도봉구 민간단체 소개 인터뷰 #38


쿤스트하우스

(김채운 대표)


 

 

날이 좋다가도 수능날이 되면 추워진다는 전설(?)이 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창동역 1번 출구 앞에서 김채운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다.

잠깐 기다리는데도 온몸이 시리다.

예상치 못한 추위라 몸이 적응이 안됐는지 광장에 덩그러니

서있는 것이 힘들어서 잠시 무중력지대로 옮겨서 몸을 녹였다.

채운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광장으로 나갔다.

간만에 선생님의 모습을 보니 더 반갑게 느껴진다.

우리는 따뜻한 너른마루 카페로 이동했다.

 

 

 

쿤하라는 명칭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나요?

각자 활동을 하던 아티스트들이 내가 가진 재능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몇몇이 모이게 되었다. 예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도구이기 때문에 예술을 믿고 그 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정하자고 결정하면서 예술인의 집, 독일어로 쿤스트하우스(Kunst Haus)로 만들게 되었다. 원명이 길다보니 부르기 편하게 쿤하로 짧게 사용하지만 회사명은 원명 그대로 쿤스트 하우스(이하 쿤하)로 사용하고 있다.

 

△ 쿤스트하우스 김채운 대표

 

지역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나 동기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쿤하는 마음의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예술공연으로 힐링하고 예술을 배우고 싶으나 어려운 환경 때문에 예술을 접하기 어려운 아동청소년을 위해 활동한다. 쿤하는 아동청소년들에게 체계적인 예술교육을 하고 이를 통해 외롭고 소외된 상처와 마음을 만져준다. 그리고 상처가 회복될 수 있도록 돕자는 활동취지가 있다.

2010년 처음 공연을 기획해서 쿤하활동을 시작했다.

쿤하활동과 취지가 도봉구에 입소문을 타면서 2011년 도봉구청에서 활동제안이 들어왔다. 당시 도봉구청 드림스타트에 예술교육이 부재했었는데 지역의 저소득층 가정의 아동을 위한 예술프로그램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당시 나는 라이솔트공연기획사에 근무하고 있어서 쿤하의 행정부분을 맡아서 도왔다. 쿤하 초기 멤버인 예술인 4명이 종합예술프로그램인 옐로드리머을 만들어 드림스타트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지역활동과 함께 쿤스트 하우스가 개인사업자로 등록하게 됐다.

 

△ 2015 드림스타트 합창단 옐로드리머 공연 사진 (출처: 동북일보)

 

 

쿤하의 학생대상 예술프로그램은 어떤 프로그램들이 있나요?

노래, 악기, , 연기, 밴드 등 다양한 예술을 전문가에게 배우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동 놀면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하고 청소년들은 주체성을 가지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다. 단순히 기능적인 예술보다는 생활에서 예술로 나를 표현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다. 결국 예술교육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건강한 성장기를 보낼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다.

우리가 만나는 아동의 대부분 우울증, ADHD와 같은 심리적 문제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아이들이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 아이들이 집밖으로 나와서 활동할 수 있게 많이 움직이고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노는 프로그램을 만든다. 또한 사회에서 다소 늦은 친구들이 일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도록 같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공연 활동을 하게 한다.

건강한 친구들은 느린 친구들을 배려할 수 있도록, 느린 친구들은 건강한 친구들의 건강한 에너지를 받을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며 보폭을 맞추며 같이 성장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옐로드리머 안에서 바르게 성장하여 이 아이들이 사회에서 좋은 영향을 끼치는 어른으로 자라길 바란다.

 

 

쿤하의 활동과정과 활동내용이 궁금합니다.

드림스타트12세 아동까지만 활동대상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우리와 함께 더 이상 활동할 수가 없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아이들이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 하는 모습을 종종 봤다. 이를 보면서 많은 고민이 들었다.

그때 도봉교육복지센터에서 진행하는 통합성장프로그램을 알게되어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도 계속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예술로 아동청소년들을 계속 만나다 보니 아이들의 심리에 대해서 놓치고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2년간 연극치료를 배우고 심리학 공부를 했다. 그리고 청소년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가 청소년들을 제대로 만날 준비가 됐던 것 같다.

예술을 전공한 청년들이 대학졸업 후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것을 보고 쿤하에서 같이 활동해보자고 제안했다. 청년들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 지역에 기여하고 아이들은 전문가를 통해 예술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청년예술가와 지역의 아동청소년들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계기가 마련됐다.

쿤하의 프로그램이 아이들의 성장에 좋다는 평가가 서초구에 알려지면서 서초구청으로부터 프로그램진행 요청이 들어왔다. 이를 계기로 2015년부터 서초구청에서도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됐다.

그 후 도봉혁신교육지구사업이 시행되면서 쿤하가 거점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혁신교육지구사업을 맡아서 하고 있다.

 

*도봉구혁신교육지구 - 쿤스트하우스 마을학교 신청을 원하신다면? 링크 클릭!

http://happyedu.dobong.go.kr/Lecture/vschool.asp?strSearchType=1&strSearchKeyword=%EC%BF%A4%EC%8A%A4%ED%8A%B8%ED%95%98%EC%9A%B0%EC%8A%A4&

 

저 개인적으로는 마을예술창작소에서 1년간 근무를 했고 그 후 도봉구청에 들어가서 마을공동체과 사회적경제팀에서 근무를 했다. 구청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전에 예비사회적기업 라이솔트에서 3년 근무한 것이 인연이 됐다.

 

마을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마을예술창작소에 다닐 때 근무지 옆예 마을사회적경제지원센터가 있었다.

그곳의 활동가분들과 친분이 생기다보니 마을활동에 더 관심을 갖게 됐던 것 같다. 이런 친분은 쿤하의 옐로드리머가 활동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마을예술창작소가 문을 닫으면서 옐로드리머의 연습공간이 사라졌다.

그때 마을사회적경제지원센터의 공간이나 허브센터의 공간을 빌려 사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예술활동가와 지역활동가가 서로 알게 되면서 활동영역도 넓히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현재 몇 몇의 예술활동가는 구청에서 진행하는 청년인큐베이팅 사업에 참여해서 바리칸토라는 팀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바리칸토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시겠어요?

△ 뮤지컬 퍼포먼스팀 '바리칸토' (출처: 바리칸토 페이스북)

바리칸토는 처음 장미꽃 청년들이라는 팀명으로 활동했다. 장미꽃 청년은 타 지역의 청년들로 구성됐다. 이 청년들과 쿤하가 함께 같은 모티브로 도봉에서 버스킹을 했었다. 올 해 장미꽃 청년들이 구청사업에 지원하면서 팀명을 바꿔 바리칸토로 활동 중이다. 바리칸토는 뮤지컬 퍼포먼스 팀이다. 공연도 하고 사업도 하고 있다. 이 분들은 쿤하의 강사이면서 바리칸토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쿤하는 사업장이나 연습실이 없나요?

없다. 프로그램을 위한 연습공간이 필요한데 아이들이 연습할 공간이 마땅히 없다. 쿤하의 사업장은 이번에 마을사회적경제센터에 코어워킹으로 들어갔다. 쿤하도 마을사회적경제로 전환하려고 준비 중에 있다.

 

 

여러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본인을 소개한다면 어떻게 소개하시겠어요?

저요?(웃음).” “저도 참 요즘 고민이에요.” “난 도대체 뭔가.”(웃음)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나의 정체성은 뭔지 가끔 고민스럽다.

굳이 말하자면 아카데미 원장, 공연기획자 이렇게 소개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아카데미 원장이라면 학원을 운영하시나요?

ETA Lab Academy(Emotional Touching of Arts)을 만들었다.

감정터칭 예술교육 예술로 행복한 아이를 키우자는 취지에서 만들었다.

쿤하 강사들은 쿤하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아카데미강사교육을 먼저 받는다.

우리는 일반 실용음악학원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 수업이 먼저 선행돼야한다.

왜냐하면 전문적인 예술교육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는 것도 같이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육함에 있어 아동청소년들이 예술교육을 받으면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야기도 들어주고 많이 안아주어야 하는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러다보니 강사채용 전에 인터뷰를 2시간 정도 진행한다. 인터뷰를 통해 아이들의 특성을 알려주고 활동의 난이도 등을 설명해드린다. 그리고 선생님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게 될지 들어보고 의지를 파악한다.

이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선생님들의 의지가 중요하다. 실제로 일이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 두시는 분도 있다. 그래서 우리 쿤하 선생님들은 예술적 실력도 좋지만 정말 인성이 훌륭하신 선생님들이시다.

우리가 전문적인 치료기관은 아니지만 연극치료와 감정코칭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들도 감정이입이 되면 일이 힘들어진다. 때문에 이 일이 쉽진 않다.

 

 

강사는 정기적으로 양성되나요?

현재까지는 비정기적이었지만 앞으로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강사를 배출할 예정이다. 현재 아카데미교육은 현 활동 강사들도 직무교육으로 받고 있다.

 

 

인터뷰를 해보니 선생님께서는 소외계층이나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대상도 아동부터 노인 그리고 장애인과 비장애인 계층과 연령에 상관없이 도움이 필요한 분들께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럴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첫째 20대 때는 계속 도전하고 넘어지고 도망가는 일이 많았다. 결국 예술을 포기하고 일반직장에 다니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서른살이 되자마자 사직서를 던지고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닥치는 대로 최대한 많은 활동을 했다.

나는 처음 예술을 배울 때 너무 힘들게 배웠다. 그 당시 이미 풍족하게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저렇게 다들 잘나갔다. 그런 반감 때문일까 활동하면서 재정적으로 안정적이고 풍족한 사람들 보다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마음이 더 끌렸다. 그리고 예술을 가르치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위로하고 싶었다.

20대 때부터 시간이 허락하면 복지관이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활동했다. 신앙적인 부분에서 많은 동기부여가 됐던 것 같다.

배워서 남 주자가 모토였다.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자존감도 낮고 자신감도 부족했다.

20대 때 화려한 무대에 서고 싶었고 그런 삶을 꿈꿔왔다.

그런데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오는 좌절감과 절망감으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

그 후 무대를 떠났고 음악도 노래도 예술과 관련된 모든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20대 후반에 의료업계에 들어가 3년간 열심히 돈을 벌었다. 돈도 많이 벌어봤지만 마음의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우울증도 심했고 마음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때 독일유학에서 돌아온 신지연 언니를 만났다.

너 그렇게 열심히 음악 배웠는데 뭐하냐?” 라는 한 마디가 나를 흔들었고 힘을 줬다. 당시 나는 뭐든 움직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생각 없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당시 마음이 바닥을 치는 상태에서 시작한 활동이라 모든 게 감사했다.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이런 기쁨을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한 사람인줄 알았다. 활동을 하면서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동안 내가 교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을 다시 보게 됐다.

 

 

 

앞으로 향후 계획이나 쿤하의 비전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사실 쿤하를 이렇게 오래할 계획은 없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지금까지 와서 나 자신도 놀라고 있다.(웃음)

주변에서도 기적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쿤하가 지금 이렇게 성장한 모습을 주변에서 좋게 평가해준다.

 

요즘 관심사는 아동청소년이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안정된 환경을 제공해줄지 고민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 아티스트들의 권익을 보장해줄지 고민하고 있다. 현재하고 있는 일들과 사업이 자리를 잡고 지속가능해야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쿤하가 10년째 교육사업을 하고 있다 보니 그동안의 노하우를 정리해서 전문화시키려 한다. 복지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교육사업을 해볼까 한다. 예술가와 아동청소년이 함께 지역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비영리단체에서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하려고 한다.

 

 

활동 중에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사실 자본이 없어서 힘든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선입견과 소외된다는 느낌이다. 내가 만나고 있는 대상자들은 힘없는 약자들이다. 나또한 힘없는 단체의 대표이다. 그러다보니 지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보다는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지역에 공간이 마련된다고 해서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서 함께 공간을 만들었지만 막상 우리는 사용할 수 없는 공간이 됐다. 이런 현실 앞에서 무너질 때가 있다. 힘없는 단체이다 보니 우리의 상황이나 입장은 고려되지 않고 일이 진행될 때 힘든 것 같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활동을 지속하게 하는 연결고리는 무엇일까요?

신앙과 관련된 게 크다.너무 신앙적인데..”(웃음)

저의 모토는 성경말씀에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다.

20대 후반 생사를 오가면서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후에 내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채운아, 네가 거기에 있어서 정말 보기 좋았어.” 라는 말을 듣고 싶다.

사실 쿤하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마음이 모여서 선한 힘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가 쿤하에서 해야 할 역할은 쿤하가 내 것이 아니니 다음 사람을 위해 좀 더 튼실한 재정여건과 튼실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 쿤하를 맡았을 때 나처럼 힘들지 않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 쿤하를 더 선한 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그간의 활동경험을 토대로 단체가 변화되어야하는 지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언제 부턴가 유사한 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많이 생겼다. 사업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든 그렇지 않든 너무 많은 사업 단위들이 생겼다. 그러다보니 내실은 없고 명맥만 유지하는 느낌이다. 이런 유사한 단체들이 비슷한 일을 하면서 하향평준화 된다는 느낌도 있다. 사업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예술가 후배들 예술의 발전과 지속성을 생각하며 사업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도봉구시민협력플랫폼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도봉구에 공간이 많이 있다. 그런데 이런 공간을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도봉구에 행사도 많다 그런데 거의 비슷한 행사. 사업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비슷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플랫폼이 이런 정보의 창구가 돼서 흩어진 정보를 통합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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