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두번째 커피 한 잔 

20171213일 수요일 오후6시에 도봉구청 앞 탐앤탐스 카페에서 문경수 대표님을 만났다.


 

지역활동의 계기,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1976년에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지역에서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대학 다닐 때 노동운동을 했고, 그래서 이소선 여사(전태일 열사 어머니)와 친분이 있었다. 마침 이소선 여사가 도봉에 살고 계셔서 아이 키우면서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을 나누었다. 이소선 여사가 판자촌을 보여주며 여기서 활동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지금은 발바닥 공원으로 잘 조성되어 있지만, 그 당시 방학동 은행나무부터 방학사거리까지 이르는 방학천을 따라 1370세대의 판자촌이 있었다. 지금의 어린이집은 없던 시절이었고 탁아소도 없다 보니 아이들 보호가 전혀 되지 않았다. 판자촌 집을 하나 사서 탁아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혜영이,용철이 사건(지하 셋방에 살고 있었음.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요강과 간식거리를 방안에 넣어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출근. 남매가 불장난하다가 방안에서 숨진 사건)으로 이슈가 되어 1991년 영유아 보호법이 제정되었고 지금의 어린이집이 생겨나게 되었다. 도봉에도 혜영이, 용철이 남매네처럼 아이를 맡길 데 없는 맞벌이 가정들은 밖에서 문을 잠그고 일을 하러 나가기도 했다. 이렇게 가슴 아픈 희생으로 7,80년대 사람들이 경제를 세운 것을 다음 세대가 잊지 않았으면 한다.

오전 7시부터 오후 8시까지 탁아소를 운영하고 아이들을 돌봤다. 당시 선생님들은 실비만 받고 근무했다. 가난한 환경에 알콜 중독인 아버지들이 거의 80%였다. 가정폭력도 심했고 아이들은 학대 받았다. 결혼식도 못 올리고 혼인신고도 못한 동거 가구도 많았다. 그래서 결혼식도 많이 올려주었다. 가정을 살리는 것이 첫 번째라 생각하여 부모교육을 했다. 시범적으로 아버지 교육을 진행했는데 첫 번째 주제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연탄을 갈아보자였다. 부모의 역할 분담이라든가, 가정을 잘 지키게 교육을 했다. 그리고 모든 행사에 절대 술을 준비하지 않았다. 판자촌은 생활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집마다 화장실과 수도시설이 제대로 없었다. 양털 자르는 부업을 많이 했는데 그래서인지 폐병 환자들이 많았다. 고려대 의대 교수님이 한 달에 한 번씩 학생들 데리고 오셔서 폐병 환자 진료와 치료를 해주었다.

사회복지 활동하면서 무료는 지양했다. 탁아소도 23명을 받아서 운영했는데 하루에 500원씩 받았다. 아이들이 크면서 학령기가 되고 학습지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창고를 수리해서 공부방도 열었다. 6,70명 정도 공부방을 이용했다. 당시 덕성여대 쿠사라는 동아리에서 공부방 운영에 도움을 많이 주었다. 보육과 교육을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를 운영했다. 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해 마을잔치도 여러번 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선생님이라는 호칭 대신 삼촌, 이모라고 부르게 했다. 아이들 낮잠시간에는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가정현황도 파악하고 대책도 마련했다. 밤에 주민교육과 회의를 많이 했다. 다른 판자촌 철거 투쟁 연대도 많이 다녔다. 한번은 복지전공에서 배운 것을 실행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주민 대상으로 수요조사를 했는데 간첩이라고 주민신고가 들어간 적도 있었다.(웃음^^)

한살림 생협 초창기 멤버다. 환경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판자촌 환경에서 가정 먼저 물을 깨끗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쓰레기를 하천에 그냥 버려서 하천 오염이 심했다. 함께 회의를 해서 펌프로 물을 길던 것을 공동 수도를 설치하고 쓰레기를 깨끗하게 처리하자고 캠페인도 했다. 비용을 내서 쓰레기도 수거해가게 했다.

공부방 이름을 함께 논의해서 뚝방 공부방에서 다솔 공부방으로 바꿨다. 판자촌 주변으로 갑자기 아파트가 엄청나게 들어섰다. 판자촌 아이들이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 싶어 하는데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이 못 놀게 하더라.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판자촌에 사는 아이들의 생활격차가 크다 보니 아이들의 상처가 컸다. 아이들이 방황이 심해지게 되니 판자촌이 우범지역이 되었다. 아이들의 일탈이 심해져서 폭력을 반대하는 평화교육을 하며 아이들의 다친 마음을 달래주었다. 95년에 동학농민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로 주민 조직해서 역사유적답사를 했다. 유홍준 교수가 이끌었는데 너무 인상 깊었다. 이것을 계기로 아이들이 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 바르게 자랐으면 해서 아이들에게 역사교육도 했다.

탁아소, 공부방 운영하면서 장학금 연결해서 아이들 학교 다니게 했다. 공부방 다니던 아이가 학교 졸업하고 다시 공부방으로 자원봉사하러 올 때 가장 보람을 느꼈다.

91년도에 영유아보호법이 제정되고 그에 따라 정부에서 새마을 어린이집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기존 탁아소들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는 공부방 운영에만 집중했고 2000년도 초반까지 운영했다.

주변아파트와 판자촌이 공존하는 것이 힘들었다. 당시 구청장이 자진 퇴거하는 집주인들에게 아파트 임대권을 주었다. 그렇게 하나둘 판자촌을 떠났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독립적인 아파트 생활을 많이 힘들어했다. 지금의 발바닥 공원을 조성하는데 판자촌 주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러한 희생이 하나도 공유되지 않는 것이 속상하다.

판자촌을 떠나고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14년 근무했고, 현재는 성가정노인종합복지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노인복지관은 유료로 운영하고 있는데 어르신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함께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95개 프로그램을 다 재능기부로 운영하고 있다.

 

사회복지 전공과 사회혁신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동양제과에서 노동자들 월급 계산하는 총무로 근무했다. 회사 앞에 성당이 있었는데 성당에 다니면서 천주교 교리와 가치를 습득하였다. 그래서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관찰, 판단, 실천을 통해 나 자신을 많이 내려놓고 상장했다. 복지가 적성에 맞았고 배운 것을 현장에 적용하는 재미가 컸다.

 

활동하면서 어떤 위기가 있었나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사회운동을 하려고 했으면 결혼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가족, 특히 아이들의 희생이 넘 미안하다. 자녀에게 온전한 케어를 해주지 못한 것이 늘 미안하다.

활동하면서 외모를 꾸며 본적이 없다. 미용실도 46세에 처음 가봤다.(웃음^^) 사회운동하는라 멋부리는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격식에 맞게 옷을 입고 치장을 하는게 너무 어렵다.

내 인생의 좌우명이 해보기나 했어!’이다. 해보지도 않고 걱정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진정성을 담아서 일을 하면 안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어떤 일이든 원칙적으로 정직하게 일을 하고 의견을 수렴해서 진행하면 된다.

 

시민협력플랫폼에 대한 기대와 당부가 있다면 해주세요.

 

플랫폼 제 역할을 잘했으면 좋겠다. 기본에 충실히 하는 게 제일 힘들다. 본연의 목표를 잘 살려서 꼭 같이 했으면 좋겠다. 실패해도 성공해도 끝까지 함께! 그리고 결정한 것에 뒷담화하지 말고 결정된대로 하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