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커피 한 잔. 

117일 화요일 오후2시 외대앞 스타벅스에서 정보연 선배님을 만났다.



 

지역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시나요.

 

 운동권 학생으로서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 때 운동을 했었고 자연스럽게 시민사회운동으로 연결되었던 것 같다. 천성적으로 돈버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주에는 아주 돈이 없지는 않다고 한다. 10-15년 동안은 남과 다른 삶을 사는 게 불편했다. 혼자 다른 길을 가는 게 외롭고 불편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아빠의 직업을 물으면 시민활동가라고 답하는 게 어색했다. 지금은 큰 딸아이의 선생님이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시민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신 것 같다. 아이를 통해 그에 대한 내용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도봉구 안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셨는데 학생운동 이후 직장을 다니다가 시민활동을 하셨는지.

 

90학번으로 재수를 했었다. 초창기에는 힘들었다. 학생운동과 시민활동은 차이가 있다. 도봉청년회를 만들었지만 고립된 섬의 느낌이었다. 통로가 없었다. 2년간 별다른 활동 없었다. 강좌 등으로 관심을 모아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당시 북한에 아사자가 많아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교회, 사찰, 성당, 가게 등에 들어가 후원금을 모았다. 김연순, 송건, 임성규 등 지역의 시민운동가가 모이기 시작했고 주민과 접촉하였다.

도봉푸른청년회가 진보정당을 지역에서 준비하자고 의결하였다.

풀뿌리주민운동을 통해 시민과 소통하면서 개인적인 생각이 바뀌었다. 운동권에서 볼 때 수준이 낮지만 깊이가 있었다. 진보정당 활동가에서 시민운동가로 전환하고 운동가로서 좋은 경험을 했다. 높은 가치로 위에 있는 것보다 시민 속으로 들어가 개척교회처럼 활동하는 것이 좋았다.

도봉푸른청년회의 정체성이 조금씩 바뀌었다. 도봉푸른청년회가 1996년에 창립하여 1999년에 해산했다. 2000년도에 도봉시민회로 이름과 성격이 바뀌었다. 현재는 회원으로만 남고 활동가는 별로 없는데 도봉시민회는 주부활동가로 구성되었고 주부 3명이 반상근 활동가로 시작했다. 눈부신 활동을 했고 활동의 폭도 넓어졌다. 지역의 주인은 주부다. 민우회를 통해 주부들을 통해 지역 활동하는 것을 배웠다.

생활은 아내의 수입과 강의로 인한 수입으로 했다. 2015년에는 찾동에서 활동했다.

시민이 나의 종교이고 시민회는 나의 분신이다.

 

일 년 동안 활동을 쉴 때 외로웠나요.

 

 많이 외로웠다. 젊은 남자들이 활동 하게 조언해주고 싶었는데 대부분의 활동가가 주부였다. 더 보살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속 얘기를 잘 하지 못했다. 나를 제대로 다 오픈하지 못했다.

 

시민회 활동 외 다른 영역의 활동은 어떤 것을 하셨나요.

 

 도봉구 구의원 활동을 해봤다. 구의원 출마 해보면 재미있다. 작은 정치라 부담도 적다. 시민활동과는 다른데 시각을 넓히는데 도움이 된다. 구의원 한번 했는데 아직도 공무원들이 구의원으로 부른다. 이런 부분에서 도움이 되는 것도 있더라.(웃음^^) 28살 젊은 나이에 구의원을 해서 좋게 보인 측면이 있었다. 선거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민주당 공천을 받았지만 공천력이 없는 곳에서 당선이 되었다. 당시에는 무보수 자원봉사여서 당선되기 쉬웠던 것 같다. 좋은 경험이었다. 구의원하니까 여기저기 참여할 수 있었고 방아골 복지관과 연계된 활동도 하고 북한돕기운동 등 다양한 활동에 개입할 수 있었다.

초안산 생태공원 투쟁을 했는데 당시 사유지에 골프 연습장을 짓는 거여서 짓지 말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당시 민우회가 주민 편에 서서 생태 살리기 운동을 했다. 민우회가 당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구의원들과 구의회 동원해서 건축법을 엄격히 들이대면서 골프연습장 건설 중단을 이끌어냈다. 이후 시에서 부지를 사도록 했다. 권력이 있으니까 해결이 되더라.

 

다양한 이해와 입장을 어떻게 담아내려고 노력하셨나요.

 

 40대 이하 구의원은 거의 없었다. 당시 김용석(현재 시의원)의원과 나는 정치적 고려보다는 주민의 편에 서서 판단했다. 재선의원 그룹들이 우리의 의견을 뒷받침해주었다. 그래서 당에서 요청하는 정치적인 것들 잘 받지 않았다. 당에서 미움도 받았지만 다시 출마할 생각이 없었기에 괜찮았다.

 

당에서 어떤 것을 요청했나요.


 당시에 당 원로가 지역신문 사주였다. 지역신문을 확대하는데서 필요한 지원이라든가 건설을 하는데 해서 필요한 지원 등을 요청했다. 이권 개입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일개 구의원도 파워가 크더라. 계속 구의원 하다가는 자신을 망칠 것 같아서 그만뒀다. 구의원 활동 내내 원칙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보람되고 자랑스럽다.

활동 당시 발바닥 공원을 조성했다. 발바닥 공원 부지에 무허가 판자촌 30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매일 그분들과 먹고 자고 하면서 설득했다. 판자촌에 살던 분들 잘 나가게 하고 발바닥공원을 조성했다. 그 때 그분들이 너무 고맙다고 하면서 100만원을 주시더라. 마음만 받고 100만원은 다시 돌려드렸다.(웃음^^)

 

구의원 끝나고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도봉푸른청년회와 도봉시민회에서 활동했다. KYC 전국청년단체에서도 활동했다.

 

활동비는 어떻게 하셨나요.

 

활동비는 없었다. 주로 당 일을 하면서 받고 아내가 생계를 책임졌다.

 

결혼은 어떻게 하셨나요.

 

대학 졸업 후 바로 결혼했다. 27살이었다. 결혼하고 청년회 활동을 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출마했었다.

 

도봉시민회 첫 반상근 활동가 세분의 주부들은 어떻게 교육하셨나요.

 

세분 중 두 분은 시민활동 경험이 있었다. 나머지 한분은 도봉시민회에서 운영하는 정보화교육 프로그램 수강자였다. 정보화교육은 1기가 2기를 전기수가 다음 기수를 교육하는 방식이었다. 정보화 교육을 통해 좋은 분들이 도봉시민회에 들어왔다. 도봉시민회는 다른 단체와 달리 어떤 가치를 위해 들어오기보다는 도봉시민회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가입하게 된다. 더 풀뿌리에 가깝다.

 

지역을 떠나고 다시 활동하게 된 계기는

 

암투병하면서 양평에 있는 산에서 3년을 살았다. 3년 지나니까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활동하고 싶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활동을 하고 싶었다. 당시 박원순 시장 때였는데 개인적 친분도 있어서 시 찾동 지원센터에서 근무했다. 2015년은 주32016년은 주4일 출근했다.

 

활동하면서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고 극복은 어떻게 하셨나요.

 

일과 관련되어 힘들었던 것은 주민에 대한 기대, 공적인 활동에 부응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배반당했을 때이다.

산에 들어갔을 때 도봉시민회 내부에 어떤 지위를 두고 분쟁이 발생했다. 내 분신 같은 존재인 것이 무너지는 느낌, 내 커리어가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믿었던 곳이다 보니 상처가 되더라. 단체에서 분쟁이 생기고 신뢰가 떨어지면 사람들이 떨어져나가고 단체는 망하게 된다. 극복을 산에서 도 닦으며 했다.(웃음^^)

 

내가 제일 잘 한 활동은 무엇이고 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하실 건가요.


 내가 제일 잘 한 것은 모르겠다. 암 투병 한 지 3년 지나니까 슬슬 심심해지더라. 현장에서 활동하는 친구들 보니까 재미있을 것 같고 질투도 나더라. 도화지 펼쳐놓고 하고 싶을 것을 써봤다.

시민이니셔티브. 주민이 공공의 주인이 되고 주민이 설계하고 주도하는 사회, 마을계획을 하고 싶다. 그리고 사회치유프로그램을 하고 싶다. 내안에 있는 불안감을 치유하고 싶은 마음도 작용한 것 같다. 사회치유가 어떤 것인지 정의하고 만드는 역할을 하고 싶다. 사회 진단부터 해야 한다. 종교가 하지 못하는 사회치유를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아내가 교사인데 요즘 아이들이 공격성이 크다고 하더라. 이러한 공격성은 교육보다 치유가 필요하다.

 

시민력 강화에 대한 조언 해주세요.

 

 그 길을 잘 찾으셔야.(^^)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는 시민사회를 통해서 지역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현재는 단체를 통하지 않고도 지역 활동을 할 수 있다. 지금 베이스는 단체를 염두에 두지 말고 제3지대를 염두에 두고 장을 열었으면 한다. 단체들은 자기 단체성격에 좀 더 깊숙이 파고들고 정치력을 높이는데 집중해야 한다.

주민은 교육을 통해 변화되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게 지원하여 역량 강화해야한다. 일정한 자산을 지원하여 스스로 해볼 수 있게 하는게 좋을 것 같다.

 

네트워크 사업할 때 유의할 것은 무엇인가요.

 

 네트워크를 하면서 뒷담화하지 말자. 북한 동포 돕기 운동할 때 자기 단체 활동보다 모이는게 재미있었다. 그런데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뒷담화를 하더라. 뒷담화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된다. 부정적 에너지보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휘했으면 좋겠다. 부족함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끌어내줬으면 한다.

네트워크가 능력 밖에 많은 일을 하려고 욕심을 내고, 몇몇 단체들만 성과를 가져가려고 하면 일이 틀어진다. 초창기에는 부담할 수 있을 만큼 하는 것이 좋겠다.

 

변화된 시대에 흐름에 맞게 후배활동가들에게 조언해주세요.

 

 각자하고 싶은 것을 해라. 많이 접해보면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알게 될 것이다. 활동가들에게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한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옛날 운동권 방식이다.

활동가들은 자기 중력,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주민운동에서는 비합리적인 모순에 대한 정의감만으로 주민을 끌어당기는 것이 많지 않은 것 같다. 활동가가 자기만의 향기로 사람들을 끌어당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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