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구 민간단체 소개 인터뷰 #59

 

역사만들기

(대표이사 이기만)

 

최근 비가 와서 그런지 하늘이 매우 맑고 깨끗하다.

들뜬 기분으로 창동역에서 환승을 해 15번 버스를 타고 우이동으로 향했다.

역사만들기 이기만 선생님을 만나는 날이다.

핸드폰 앱에 의존해 길을 나섰지만 무용지물 또 헤맨다.

결국 이기만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도움을 요청했다.

친절하게 마중을 나오신 선생님을 따라 우이동 주택가로 들어섰다.

와~ 옛 정취가 그대로 남은 동네이다.

장독대와 단독주택들의 대문들이 눈에 띈다.

어릴 적 옛 기억의 동네가 떠올랐다.

추억을 소환하는 아름다운 동네이다.

 

파란색 대문 앞에 섰다.

갑자기 이기만 선생님께서

“개 좋아하세요?” 하고 물으신다.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요.”

“저희 개가 사람을 무척 좋아합니다.”

“근데 좀 커요, 제 뒤에 붙어 따라오세요.”

 

마음을 졸이고 선생님의 뒤에 붙어 대문을 들어섰다.

덩치는 크지만 매우 순한 개인 것 같다.

하지만 무서워서 쳐다보지도 못하고

선생님 뒤에 바짝 붙어 무사히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무실이라기보다 정말 운치 있는 아름다운 서재 같다.

선생님께서 내주신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이 안식처 같은 공간을 두리번두리번 살필 수밖에 없다.

공간을 둘러 본 후 선생님과 탁자에 마주 앉았다.

▲ 역사만들기 사무실 입구

 

❍ 역사만들기를 시작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문화작업을 하는 주식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역사만들기는 주식회사이다.

외부에서 볼 땐 작은 단체 정도로 볼일 것이다.

실제로 작은 회사이다.(웃음)

 

주식회사를 설립하기 전에 협동조합도 고려했지만 책임소재가 분산되고 집행의 어려움이 있다는 단점이 있다.

협동조합은 논의는 매우 잘 할 수 있다는 좋은 점이 있지만 그 논의를 하나로 모으고 실행하는 데는 만만치 않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역사만들기는 처음부터 주식회사로 시작했다.

역사만들기는 지역의 역사와 지역민의 삶의 문화를 조사하는 회사이다.

우리나라에는 기초지자체가 총 250여 개 있다.

그 중 약 60여 지자체를 다니면서 조사하고 연구해서 해당 지역의 공식적인 역사문화서를 발간했다. 이런 일을 현재 30년째 하고 있다.

아마 이 분야에 우리만 한 회사가 없을 것이다.(웃음)

그런데 일을 해보니 이 일은 민간에서 할 일이 아니더라.

긴 시간투자와 연구비가 필요한 부분이다.

사실 이는 공공의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이다.

 

❍ 연구조사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궁금합니다.

대개의 경우 지자체와 3년 내외의 기간을 설정하여 계약을 맺고 조사와 연구 작업을 시작했다.

연구용역 계약을 맺기까지 해당 지역의 대학이나 연구기관과 경쟁을 치러야한다.

계약을 마치면 그 지역의 연구자들과 함께 팀을 짜서 연구를 시작한다.

지역과 현장을 다니면서 녹음하고 조사된 자료는 대략 3,000~4,000페이지 가량의 책으로 발행된다.

이 과정은 길게는 4-5년 짧게는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처음부터 연구용역일을 맡아서 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 10년 정도는 디자인, 편집, 교정하는 편집대행 작업을 했고 20년차부터 연구자들과 함께하는 연구용역 작업을 하고 있다.

▲ 역사만들기 사무공간과 이기만 선생님

 

❍ 선생님께서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80년대 학생운동을 했고 명동성당 청년회에서 활동했다.

당시 녹화사업(강제징집사건)에 의한 사망자사건을 조사하게 됐다.

83년 성탄 즈음 한희철 선배가 말년 휴가를 나왔다.

명동성당 청년회 행사를 보고 우리에게 열심히 잘한다며 격려를 하고 한 달 후에 보자는 약속을 하고 복귀했다.

그런데 한 달도 안돼서 총기 자살이란 비보를 받게 됐다.

여러 정황상 말도 안 되는 자살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학교나 일반사회에서는 손을 댈 수 없었고 종교계에서 이를 조사하게 되었는데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조사작업을 책임지고 맡아 진행했다.

조사권이 없다보니 희생자유족을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10여 명을 조사해서 보고서를 작성해 김수환 추기경님께 보고했다.

대학졸업 후 군대 가는 대신 청년단체 연합시위 주동자의 한 명으로 참여하여 구속이 되었다.

당시 시위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회가 중심이 되어 천주교, 불교, 기독교청년 및 문화운동단체 청년들이 연대해 대규모 가두시위를 조직하였다.

이후 출소를 한 후 빈민운동에 함께했다.

지금은 해체됐지만 천주교도시빈민회 활동을 통해 제정구 선생님과 정일우 신부님 등을 만나 빈민운동을 했다.

지금까지도 제정구 선생님만큼 존경하는 그런 사람은 없다.

 

당시 나는 지금의 도봉동, 상계동, 미아동, 정릉, 동소문동 등 서울북부지역을 담당하는 지역활동 총무였다.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천막농성을 했던 상계동 철거민들 중 남양주 배밭으로 이주해간 분들을 지원하는 작업과 여러 철거 재재발지역의 주민조직을 지원하는 다양한 활동에 함께 했다.

그 후 제정구 선생님께서 정치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드셨던 1989년 무렵

나는 천주교도시빈민회를 나와 사회과학잡지 <민족지평>의 편집장으로 3년간 일했다.

이 잡지의 창간준비와 3년간의 발행작업, 그리고 마지막 폐간까지 함께 했다.

그때 편집위원으로 잡지 발간작업을 함께 했던 분이 한신대의 정건화 교수님이다.

 

잡지일을 정리한 후 충무로에 책상 하나 들고 나갔다.

내가 20대 때 가장 많이 했던 일이 유인물을 쓰고 만들고 제작하고 보관하는 일이다.

명동성당에 다닐 때 조사홍보부에서 기관지 만드는 일을 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출판 관련된 일을 자연스럽게 시작했던 것 같다.

 

‘큰기획’이라고 크게 기획하겠다는 의미를 두고 기획사를 설립했다.

가톨릭 어린이달력을 처음 기획해서 만들었다. 이 달력이 5년간 히트를 쳤다.

2년 정도 기획 일을 하고 있을 때 파주에서 파주지역의 군지를 디자인작업 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의뢰를 받고 보니 이것저것 제안해야할 부분이 많았다.

제안을 했지만 비용문제로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래서 돈은 안줘도 좋으니 권한을 달라고 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서 지금의 지역사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그 때가 1992년이다. 그 때부터 지역의 역사와 관련된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처음 10년은 편집대행을 했고 20년차부터 연구자들과 함께 연구용역 일을 하고 있다.

 

나는 학부에서 사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이 작업을 하면서 관련된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까지 밟게 됐다.

현재 연구자들이 하지 않는 영역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연구자들의 책임방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웃음)

 

강북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0년 전 한신대 정건화 교수님과의 재회가 계기였다.

지역사회를 위한 대학의 역할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도모하시던 정건화 교수님과 <지역>을 매개로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동북4구 지역자원 조사를 하게 됐고 현재 강북에 머물게 됐다.

 

성북 노원 도봉 등지에 대학이 많다. 하지만 대학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연구와 조사는 매우 보잘것없다.

오히려 도봉산이나 수락산 일대의 전통적인 주민조직이나 동제와 같은 마을의례를 지내는 주민들이 지역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가 높다.

이 일대에 마을의례를 지내는 조직이 이직도 남아있다.

계모임, 상조회와 같은 형태로 20-30개 남아있고 지금도 2-3년에 한 번 의례를 진행한다.

서울지역에 아직 이런 조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에 상당히 놀랐다.

 

동제는 농업사회 전통으로 산신제이다. 산에서 제사를 지내고 산신령을 모셔와 동네를 돌며 동제를 지낸다.

동제는 온 마을사람들이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풀려나고 농사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제사이다.

도봉산이나 북한산, 수락산, 불암산 등 산을 매개로 한 이 같은 동제는 동북4구 지역에 아직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 작업실 내(內) 자료들

 

❍ 동제의 주체는 누구인가요?

마을주민이다.

현재 도봉동도 2년마다 한 번씩 동제를 지내고 있다.

이렇게 사라져가는 전통과 지역의 역사문화자원을 현재 리스트업 하고 있다.

현재 5천여 개를 리스트업 했고 보고서형식으로 작성된 책자도 발행했다.

지역자원을 어떻게 활용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이에 착안한 것이 ‘이야기 가게’이다.

‘이야기 가게’는 문화자원을 사서 판매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을 문화도시 추진사업에 제안해서 현재 진행 중이다.

그래서 작년에 도봉구에서 6·25 경험을 한 경험자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활용사업으로까지 이어지진 못했지만, 앞으로 그럴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6·25 경험자의 이야기를 당사자들에게서 직접 구입해서 학생들이 전쟁 경험자로부터 직접 전쟁과 관련된 강의나 수업을 듣는 것이다.

기본개념은 지역에 있는 주민의 특별한 경험이나 이야기를 사서 판매하는 것이다.

 

올 해부터는 도봉산 이야기를 수집하는 도봉산이야기가게가 운영되고 있다.

도봉산과 관련된 일화부터 다양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가공해서 판매하고자 하는 사업인데, 도봉산 활성화와 지역 활성화를 위한 자원으로 쓰이게 된다.

도봉문화원 회원들의 이같은 노력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가길 기대하고 또 지원을 하고자 한다.

 

몇 해 전에 강북구에 4·19 이야기가게를 제안한 적이 있다.

4·19국립묘역에 가보면 시위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여러 다양한 증언이나 일화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4·19 희생자들 대부분이 경찰의 발포에 의해 사망했다.

희생자가 쓰러진 것을 본 사람이 있고 희생자를 병원으로 데려간 사람이 있을 것이고 희생자를 치료한 의사와 간호사가 있을 것이다.

이런 목격자들의 증언을 수집해 이야기를 자료로 남기는 작업을 제안했다. 하지만 잘 안됐다.

지금 이 시기가 마지막 시기이다. 이젠 목격자도 연로해 거의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게를 문화도시 도봉에 제안했다. 현재 도봉에서는 이야기가게를 진행 중이다.

아직 초보적 단계에 있지만 현재 도봉산과 관련된 이야기가게가 진행 중이다.

우리는 역사만들기에서 발굴한 지역자원들이 지역 활성화와 지역재생에 쓰일 수 있도록 제시하는 역할을 해왔다.

▲ 역사만들기 사무실 내(內) 자료실

 

❍ 역사만들기에서는 어떤 취지로 일하는지 궁금합니다.

철거반대투쟁을 하면서 철거민의 삶과 집 없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지역민의 history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내력들을 수집하고 알리는 작업을 했다.

향토사 작업을 하는 현재는 글이나 문서와 같은 자료를 남길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역사를 기억과 구술사 그리고 그의 생애사를 통해 작업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현재 살아온 이야기도 함께 작업한다. 평가는 나중에 할 일이다.

 

시군지나 향토지를 보면 우리가 했던 다양한 작업방식을 그대로 활용해서 발행하고 있다.

사진자료집 만들기는 역사만들기를 통해 처음 유포되기 시작했다.

자료집 만들기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붐을 일으켰다.

 

시중에 있던 역사관련 책은 내용도 어렵고 분량이 무척 많다.

그래서 역사만들기에서 역사의 대중화 작업을 시작했다.

내용의 대중화, 대장의 대중화 그리고 현재화이다.

사람중심, 현재중심, 주제중심으로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재구성했다.

이것이 역사만들기이다.

 

역사만들기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지역에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해야지 엉뚱한 이야기를 해서 되겠는가?

 

그리고 과거이야기 뿐만이 아니라 최근에 살아온 현재이야기도 담는다.

이야기를 나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로 이야기한다.

의식주가 됐든 문화가 됐든 교육이 됐든 환경이 됐든 주제중심으로 풀어간다.

 

우리가 작업을 위해 지역으로 들어가면 2,3년이 걸린다.

재미있긴 하지만 매우 힘든 작업이고 수익이 안 되다보니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오래 붙어있지 못한다.

결국 이 작업은 공공의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공공의 영역에서 움직이지 않으니 우리가 손 놓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이유로 공공을 찾아가 제안하긴 했지만 잘 안됐다.

그렇다면 시간이 걸려도 우리가 하자라고 결의하고 계획을 잡았다.

우선 사람을 만들고 남겨야했다. 전국에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섰다.

서로 강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그 힘으로 전국을 다니면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한 번은 적은예산으로 통영의 섬지역을 조사해야했다.

우리 인원으로 그 많은 작업을 할 수 없어 해당 지역과 인근지역의 전문가들과 연계해 함께 작업했다.

그로서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예산이 적다고 해서 일을 엉터리로 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목표는 반드시 달성한다.

우리는 생활방식 중에서도 특이한 방식이나 공개되지 못한 이야기를 찾아 작업한다.

 

❍ 향토사연구 작업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최근 옹진지역을 작업했다. 6·25 당시 옹진지역 주민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조사를 시작했다.

옹진 7개면 섬을 다니면서 104명을 만나서 인터뷰를 정리했다.

그리고 연구보고서를 작성해서 군에 제출했다. 하지만 군에서 보고서를 반려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가 옹진 쪽이다.

덕적도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6·25 당시 상황을 증언해주었다.

한국전쟁 공식 6·25 전쟁사를 보면 군인들이 덕적도에 상륙해서 적군 7명을 사살해 전과를 올린 기록이 있다.

인터뷰를 하면서 당시 사살 된 7명을 모두 찾아냈다.

놀랍게도 모두 민간이고 그 중 2명은 임산부였다.

사실 이런 내용을 찾으러 옹진군을 찾은 것은 아니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 사람들이 그냥 자신들이 목격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올 해로 6·25가 70주년이 됐다.

이런 증언을 할 정도면 증언자의 나이가 당시 최소 연령이 15살에서 20세는 돼야한다. 현재 나이 85세에서 90세의 사람들이다.

이 분들이 증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젠 다 이야기해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살면 얼마나 살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이분들이 원하는 것은 한 가지이다.

이곳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실만을 비석에 남기라는 것이다.

 

이곳엔 해병대 상륙기념비가 많이 있다.

그것은 그것대로 두더라도 이곳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의 진실을 밝히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희생된 민간인의 비석을 남겨달라는 것이다.

 

이 작업을 하면서 국가기록과 지역의 기록이 극단적으로 대치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니 군에서는 당연히 실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연구보고서가 반려되면서 우리는 이를 책으로 출판하기로 했다.

역사만들기에서 <옹진 지역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한국전쟁 이야기>를 올 6월에 출판했다.

 

지역을 다니면서 전쟁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지역민이 어떻게 삶을 살아왔는지를 알리고 이러한 자원을 제공함으로써 지역과 지역 활성화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지역활동가와 지역운동가는 마을과 지역의 역사성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고 넓어져야한다. 현재 활동가들의 활동 반경은 넓어진 반면 깊이는 상당히 낮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런 연구는 지역의 활동가들이 해결할 일은 아니다.

상계동 마들 평야나 도봉지역의 역사성 등에 관한 이야기를 누군가 듣고 찾아내고 모으면서 지역의 역사가 나온다. 이런 연구가 필요하다.

이런 것을 활동가들이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연구기관이 필요하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 살았던 당사자,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와 자료 등을 수집하고 가공할 수 있는 연구기관내지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을 해줄 수 있는 기관이 없다보니 우리가 그 역할의 일부를 전국을 다니면서 하고 있다.

 

우리는 원천소스를 찾아주는 노력을 하고 있다.

여주의 경우 명성황후와 관련된 다양한 자원을 4년에 걸쳐 연구자와 지역민이 함께 수집하고 세미나와 조사를 통해 명성황후와 관련된 지역정보를 만들었다.

 

예산에서는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자료를 조사하면서 김정희선생님께서 자주 먹었던 음식이나 생활문화와 관련된 소스를 지역민에게 공유했다. 이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아이디어와 콘텐츠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렇게 지역의 인물이나 이야기는 지역의 원천소스로서 지역의 특색을 드러내는 상품이나 문화콘텐츠로 활용돼 지역경제를 활성화 시킨다.

▲ 이기만 선생님(왼쪽)과 사람을 좋아하는 검은 개(犬)(오른쪽)

 

❍ 지역문화를 조사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지역)문화는 어떤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는 상당히 중앙집권적이다.

지역운동가나 지역활동가의 지향은 결국 풀뿌리이다.

풀뿌리를 통해 지속성과 경제력이 생겨야 지역이 튼튼해진다.

풀뿌리가 튼튼해지고 제도화돼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역의 정치인들은 지역경제에 관심을 갖긴 하지만 그 토대가 매우 취약하다.

그러다보니 지역주민들이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조직하게 된다.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그 지역의 공동체적인 삶에 관한 소스를 찾고 제공해준다.

그리고 공유자원 활용방법을 알려준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경제이기도 하다.

 

지방에서 공유자산을 관리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눈물이 날 정도이다.

통영의 바닷가에서 갯지역을 나눠 활용하는 방법이나 바다자원을 공유하는 방법이나 산에서 나는 특산물을 공동체적으로 어떻게 관리하고 나누는가를 보면 대단히 합리적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피눈물 나게 공정하게 삯분 했는지는 문서를 보면 다 나와 있다.

 

그 중 계(契)는 대단히 합리적인 방법이다.

그릇계의 경우 평생 몇 번 쓰지 않는 그릇을 집에 쌓아둘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릇계를 통해 잔칫날이나 필요한 때에 빌려다 쓰는 계이다.

그 밖에 장례계, 결혼계, 장구계, 밥계 등도 있다.

지역의 한 마을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

금전부터 경조사 그리고 노는 것까지 모두 마을 안에서 해결된다. 이것이 마을인 것이다.

 

❍ 최근 공동체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해 곳곳에서 마을만들기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마을의 공동체적인 삶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서울에서의 마을 만들기는 차원이 다르다. 서울은 이제 더이상 농업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에서의 마을만들기는 옛 마을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한다.

마을에 대한 환상을 깨려는 것이 아니다. 마을은 농업사회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이것이 역사성이다.

 

지금은 산업사회이고 고도화된 정보사회에서 사이버 마을도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이 모든 것을 다 해준다는 환상은 버려야한다.

대신 당시 마을의 공동체적 정신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깊이 간직하면 된다.

 

❍ 역사만들기는 앞으로 어떤 작업을 계획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지역민의 이야기와 삶은 정치제도와도 떼려야 뗄 수 없다.

이러한 부분들을 자료로 잘 정리해서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게 만들고 활용되도록 하려고 한다.

앞으로 10년간은 연구용역일을 하면서 자료 플랫폼을 만들려고 한다.

우리가 조사하고 만들었던 자료와 활용했던 자료를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만들려고 한다.

책으로 된 자료는 10%도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작업 중인 자료는 일반인들이 보기엔 다소 내용이 어려울 것이다.

연구자들이나 그 외에 전문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활용도가 높을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지역정보가 나오긴 하지만 제대로 정리돼있지 않다.

그러한 부분을 보충하고 좀 더 전문적인 정보를 실어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 인수봉 숲길마을과는 어떤 인연으로 활동하시게 됐나요?

오랫동안 앉아서 일을 하다 보니 고관절이 안 좋았다.

한신대에서 활동할 당시 인수봉 숲길마을에 들어가서 몇 년간을 살았다.

몸이 안 좋다보니 풀들을 보게 되고 자연에 관심이 많았다.

인수봉 숲길마을은 자연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꽃나무교실을 열고 수업도 했다.

나무를 심고 주민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러다보니 부대표로 선출됐고 인수봉 마을에서 함께 활동했다.

당시 인수동 숲길마을이 <꽃피는 서울상> 대상을 수상했다.

그때 활동을 참 재밌게 했다.

동네에서 작은 사진전시도 하고 식물전문가를 불러서 강의도 듣고 염색 교실도 운영했다.

이곳 우이동으로 이사 오면서 인수동 숲길마을 활동이 뜸해졌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가슴 뜨거워지는 경험을 많이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조사하고 수집해서 정리하는 전기를 좋아했다.

그러다보니 지역 일을 하게 된지도 모르겠다.

 

인수동 숲길마을엔 노인 분들이 많이 거주한다. 자녀를 출가시키고 빈방이 많다.

자녀들이 출가한 빈방을 게스트하우스 목적으로 수리해서 마을도 홍보하고 수익도 창출하면 좋을 것 같았다. 이것이 서울시에서 말하는 마을기업이다.

인수동 숲길마을이 ‘꽃피는 서울상’ 대상을 받으면서 자연마을 탐방코스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을 했다.

인수동 숲길마을의 큰 그림을 그려보면 이곳을 게스트하우스로 만들어서 외국인들이 머물게 하면 좋을 것 같았다.

 

한달살이 할 외국인을 받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한달살이를 경험하게 하고 지역홍보를 하는 것이다.

이곳에 머무르는 체재비는 받지 않는다. 대신에 이곳 마을사람들이 외국인의 마을로 한달살이를 같은 조건으로 떠나는 것이다. 처음에는 많은 경비를 쓰지 않고 이렇게 해외네트워크를 형성해 놓고 점점 확대해 가면서 마을기업으로 운영하면 좋을 것 같았다.

처음 시작은 수익이 아니라 마을주민에게 일이 생겼다는 것이 중요하다.

마을회관에 모여서 기타 치고 우크렐라도 하면서 마을에 활력을 불어 넣는 것부터 시작해서 함께 모여 친환경 빵도 만들어 보고 실험적으로 이것저것 마을일을 재밌게 하다보면 마을기업을 위한 단계를 하나하나 밟게 되는 것이다.

 

❍ 지역역사의 산증인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현실에서 이 많은 분들의 증언이나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 어떻게 작업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서울지역에서는 작업을 많이 하지 않고 지방에서 주로 작업했다.

이 분들의 생애사를 보면 혼자서 잘 먹고 잘 산 사람은 거의 없다.

이웃과 함께하면서 근검하게 생활한 흔적이 많다.

이러한 지역민의 역사와 이야기는 지역에서 담아내야한다.

지역활동, 마을활동, 문화활동을 통해 지역이야기를 풀어내야한다.

우리(역사만들기)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문화도시에 가서 이런저런 제안을 많이 한다.

책으로 발행되는 것 외에 더 확장된 작업은 지역에서 풀어내야한다고 말한다.

 

지역정보는 지역민의 삶에 녹아있다. 우리는 그 소스를 찾아내고 필요한 이들에게 제공한다.

이런 자원은 영화, 광고, 도시재생 등 지역뿐만이 아니라 우리 삶과 연결된 모든 것에 유용하게 쓰인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억과 그 삶의 문화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이런 의미들이 재생과 만날 때 문화적 재생은 중요하고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때문에 문화도시가 갖는 의미도 큰 것이다.

 

❍ 역사만들기 직원은 어느 정도 인가요?

정직원은 3명이고 관리, 기획, 연구위원 등은 상근은 아니지만 전속돼서 함께 일한다.

 

❍ 문화도시에 대해 큰 의미와 기대를 가지시는 것 같습니다. 문화도시에 대한 나름에 상(想)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재작년 도봉구에서 문화도시를 준비하면서 문화도시준비위원회에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나는 문화도시에서 공공성을 목표로 하는 도봉문화주식회사 설립을 제안했다.

도봉구에 도봉문화재단이 있지만 수익을 남길 수 없으므로 문화도시사업을 통해 인큐베이팅 하는 과정에서 수익창출이 가능한 문화주식회사 설립기반을 마련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왜냐하면 정부의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부예산에 의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려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놓아야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문화도시 사업의 한 꼭지로 문화주식회사 설립 기반을 위한 계획과 실험이 들어갔으면 한다. 사업성을 따져보고 수익을 남길 수 있는 형태나 구조로 사업을 실험해보면 좋겠다. 수익이 발생하게 되면 그 수익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열악한 문화예술인들을 지원하는 체계를 만들어 가면 좋겠다.

 

우선 도봉의 문화도시 사업 중 하나는 수익이 창출될 수 있는 사업아이템으로 구성하고 이익을 남겼으면 한다. 이를 통해 문화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문화로 먹고 살 수 있는 구조와 지원체계가 마련됐으면 한다.

그 사업체 역할을 나중에 도봉문화도시가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 번째로 도봉문화도시가 지역에 있는 문화예술인들과 네트워크를 하면서 쌍방을 지속적으로 연계해주는 플랫폼의 역할을 하면 좋겠다. 이를 통해 문화예술인들이 공동의 목표를 갖고 서로 연결돼서 회사나 협동조합을 설립 운영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면 좋겠다.

도봉문화도시는 문화적 가치를 함께 공유하면서 도봉의 가치를 브랜드화 하고 이를 점점 확산하는 방식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결론적으로 문화기업을 만들었으면 한다.

규모 있는 주식회사를 만들어서 이사회를 조직하고 논의도 명확히 해서 일을 효과적으로 집행했으면 한다.

주식회사의 목표를 공공성에 두고 (주주)이사들이 이에 합의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관을 통해 공적인 목표를 명시하고 그에 대한 수익금은 공적인 목적을 위해 쓴다고 규정하면 된다. 나의 생각은 그러하다.

 

▲ 감사패 및 상패

 

❍ 문화재단과 문화기업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문화재단은 거버넌스이다.

거버넌스를 하는 순간 재정사업에 편입된다. 피할 수 없는 구조이다.

재정사업은 기본적으로 수행해야하는 사업이 있고 그 틀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문화기업이다.

물론 그 대안으로 협동조합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 보다 공공성을 강화시킨 이윤동기에서 출발한 문화주식회사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 말씀하신 문화주식회사는 어떤 역할을 하나요?

문화주식회사는 돈으로만 운영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본이다.

문화주식회사는 일반주식회사와 질적으로 달리 가야한다.

규모는 더 많은 점을 만들고 그 점을 연결시키는 플랫폼으로서의 주식회사가 돼야한다.

 

❍ 공감되는 말씀이다. 도봉구시민협력플랫폼도 지속가능성을 고려하며 시민자산화의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다. 정부의 지원이 끝난 후 지속가능의 길은 어려운 것 같다.

공공에서 지원하는 기본체계는 물적 토대를 지원해주는 것이었다.

장소, 사무실 제공 등을 지원했다. 장소를 제공하면 변화가 있을 줄 알았지만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은 소프트웨어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끼면서 벤처지원을 했다. 그리고 사회적 경제를 통해 물건을 사기도 하는 등의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

 

정부의 물적 토대이든 금융에서의 지원이든 혹은 무상지원이든 영원히 지원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평등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부나 공공에서 지원하는 것은 바운더리가 있다.

그 바운더리가 점점 넓혀지고 있긴 하지만 정부의 지원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공공의 지원이 끊기면 그간 해온 사업이 지속되지 못하고 문을 닫거나 폐쇄된다.

하지만 이런 많은 실패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다.

정부는 그 성공한 사례를 찾아서 집중적으로 지원을 해야 한다.

 

❍ 30년 가까이 역사만들기 작업을 하시면서 힘든 일도 많이 있었을 텐데 힘듬에도 선생님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오기 같다.(웃음)

예전에 YTN으로부터 세게 한 방 얻어맞은 적이 있다.

당시 경기도 문화재 안내판 개선작업을 할 때였다.

파주 자운서원에 가면 ‘율곡선생께서 사액서원’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사액서원은 임금으로부터 포상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영문번역가가 잘못 이해해 ‘율곡선생이 사약’을 받았다고 번역해 문제가 됐다.

사실 안내문을 확인하고 정정할 수 있는 과정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우리에겐 잘못된 부분을 보완하고 피드백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방송을 통해 문제제기가 되고나니 경기도와 파주시가 서로 책임을 전가하며 핑퐁게임처럼 책임을 서로에게 돌렸다.

결국 책임은 안내판 작업을 한 우리 회사로 넘어왔고 인터뷰 요청이 왔다.

나는 실수를 인정하고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실수는 할 수 있지만 잘못된 부분을 시정하고 거르는 시스템이 부재하다. 또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매우 일방적이고 관료적이다. 이런 부분이 개선되어야 한다.” 라고 말했다. 이 멘트가 방송으로 나갔고 이 말이 아나운서에겐 울림이 됐다고 한다.

실수를 하더라도 올바름에 대한 신념이 있다면 많은 것이 설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작업을 해보니 역사는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더라.

사실을 기록하고 평가는 나중에 하는 것이다.

목소리를 키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우리가 가야할 방향과 해야 할 일에 대한 신념과 확신을 갖는 것이다.

이런 확신과 믿음 속에서 재미와 보람을 느낀다.

 

사실 이일을 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다.

말했듯이 돈도 안 되고 힘든 일이다.

처음에 나는 내가 잘나서 이일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아무도 안하니까 내가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웃음)

앞으로는 일을 벌이기보다 한 일들을 농축하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 힘든 부분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나이가 들어가고 몸이 아프다는 것이 힘들다.(웃음)

인력을 확보해서 일을 진행해야하는데 그 부분이 더디게 되는 것이 안타깝다.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과 조인이 안 되는 부분이 매우 스트레스이다.

 

역사만들기에서 함께 일했던 스쳐간 사람들이 이 영역에 절반 정도 일하고 있다.

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래 일하지 못하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우리에겐 한 사람이 중요하다.

함께 했던 사람을 놓친다는 것이 제일 힘들다.

 

❍ 도봉구시민협력플랫폼을 위해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원론적인 방법이겠지만 플랫폼은 사람들이 오가는 정거장이고 모이는 공간이다.

결국 네트워크이고 소통하는 공간이다.

정거장이 있는 이유는 기차가 오고 또 가기 때문이다. 기차는 사람을 운송하는 수단이다.

플랫폼은 정체돼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공간이다.

지속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아이템이나 소스거리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이슈나 의제를 잘 장착하고 지역에 뿌리내릴 수 있는 구체적인 실행계획이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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