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커피 한 잔

118일 수요일 오전10시 도봉구의회 2층 의원실에서 이영숙 선배님을 만났다.



 

활동하게 된 동기와 계기는 무엇인가요.

 

 학생운동을 했고, 김근태 의원 선거운동을 함께 하러 96년도에 도봉으로 이사했다. 지역에서 작은 도서관 활동을 했다. 아파트에서 아이들과 독서활동을 했다. 지금의 아이나라 공간이 그때 당시 아파트 모델하우스였다. 폐쇄되고 방치되어 있어서 그 곳에 도서관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 건립 추진위를 만들고 주민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구의원 통해 서명을 전달했다. 구청장 면담하고 도서관이 생겼다. 이런 계기로 참여하면 변화한다는 걸 보고 느꼈다.

도봉시민회 초창기 멤버였다. 아이디가 꿀벌이었다. 도봉시민회 활동하면서 구의원 제안을 받았다. 도서관 건립의 경험이 있어서 구의원을 할 수 있었다. 생활정치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반쪽은 시민 반쪽은 정당 입장으로 선거에 출마했고 재선까지 했다.

 

선거운동이 힘들지 않았나.

 

 모르니까 용감해지더라. 우주가 이 길로 나를 가라고 하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몰라서 재미있게 했다. 선거도 체질이 있나보다.

여성정치인이라 불렸는데 내가 정치인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여성정치인에게 생활정치가 정말 잘 맞는 것 같다. 나의 삶터, 일터가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곳이기 때문에 생활정치가 맞았다.

 

시민활동과 정치 경험 모두 있으신데 활동가들에게 조언해주실 수 있나요.

 

 도봉구의회 구조가 여당, 야당 7:7 구조였다. 주변 시민단체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이었다. 시민단체 자만 나와도 나에게 달려들 정도였다. 2010년 선거 때 의정비에 대한 공격이 컸다. 그래서 구의회가 시민단체와 시민사회에 대한 반감이 컸다. 구의회와 시민사회 사이에서 중간 매개 역할 하는 게 힘들었다. 7대에는 유기훈 의원 등 젊은 의원등리 들어와서 좀 더 분위기가 완화되었다. 시민사회에서 행정사업을 많이 해서 시민사회 고유의 역할에 대한 고민도 있다. 시민사회에 있어봤기 때문에 중간 매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구의회 활동하면서 인상깊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시민사회도 공무원에 대한 편견이 있다. 나 역시 그랬다. 공무원도 시민사회에 대한 편견이 있다. 문제의식만 있고 책임지지 않는다는. 의원이 되니까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의원이 말하니까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봤다. 의원은 개인이 아니라 주민대표임을 느꼈다. 구의원은 보좌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영역을 다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야했다. 도봉구 곳간지킴이 분들과 예산분석도 공부했다.

제일 약한 부분이 장애인, 청년 분야였다. 노적성애라는 장애인 자립기관과 소수정당들과 장애인 권리 찾기 조례 대표 발의하고 이동시설 관련한 캠페인도 했다. 6대 때는 혼자 했는데 7대에는 이 분야의 의원이 들어와서 나눠서 하고 있다.

의원은 주민 자치력을 높여주기 위해 서포트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민원창구처럼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수 도 없다. 시민들이 변하지 않으면 교육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혁신교육, 민주시민교육을 교육 분야에 방점 두었다. 관련 조례제정 및 사업 진행하려고 했다. 공무원들은 사업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제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자기 목소리를 못내는 사람들을 목소리 내게 하는게 우리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민사회 활동을 했던 의원들 중 유일하게 재선을 했는데 그 과정이 어떠셨나요.

 

 여성정치인으로 사는 게 힘들다. 일은 많고, 가정 생활할 시간이 없고, 3D 업종 같다.(웃음^^) 초선 때에는 힘을 갖는 게 어렵고 재선해야 진짜 파워가 생기는 것 같아서 당연히 재선을 결심했다. 지금 구조는 강 단체장, 약 기초의회 구조다. 기초의회가 힘을 가지려면 주민과 더 친해져야 한다. 그런 일을 하고 싶다. 하남시는 저녁 7시에 의회를 열기도 한다. 직장인도 의회 방청을 할 수 있게 말이다. 주민참여가 되어야 의회가 힘을 가질 수 있고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가야한다.

예전에는 정치진입이 어려웠는데 구의회가 잘 역사가 이뤄지면서 단계별로 올라가는 게 수월해졌다. 국회의원들도 지방분권에 대해 너무 모르기 때문에 기초의원들이 국회로 진출하는 게 좋겠다. 여성정치인 영역이 블루오션이기 때문에 그런 비전을 가지고 임하고 있다.

 

구의회가 7:7 구조면 의장은 어디에서 하나요.

 

상반기는 여당, 하반기는 야당 이렇게 하기로 했다. 잘 지켜졌다.


방청은 어떻게 하나요.

 

 방청은 아무나 할 수 있다. 예전에 민우회 안에 의회 방청모임도 있었다. 의회 홈페이지에 신청해서 오면 되고 당일에도 신청가능하다.

의회 의장은 연령이 많거나 당선 경험이 많으신 분이 우대되기 때문에 의장 진출하기가 어렵다. 의장이 어떤 마인드로 의회를 운영하는지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는데 열린 의회를 만드는데서 이런 점이 아쉽다.

 

정치신인에게 있어 가장 먼저 뛰어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정당과 부딪히는 것이다. 무소속으로 출마하면 당선되기가 어렵다. 여성 의무 공천제가 도입되어 기회가 왔던 것이다. 김근태 의장과 친하고 존경해서 민주당에 입당했다. 선거 출마할 때 민주노동당 여성후보가 있었는데 갈등구조가 전혀 없었다. 함께 의회활동을 못해서 아쉬웠다. 민주당 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다 같은 것으로 싸잡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양한 분야의 기초의원, 소수정당도 진출할 수 있게 선거법이 개혁되어야 한다. 그래야 지방분권이 강화될 수 있다. 지금의 양당구조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당장 정당공천을 폐지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제대로 된 사람을 공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발한 연구회하고 기초의회 발전 방향을 연구하는 기초의원들 모임이 있다. 2010년부터 지방자치발전소라고 사회적기업도 만들었다. 재선하면 노하우가 많이 생긴다. 경험과 자료도 많이 쌓이고. 그런데 낙선하게 되면 이러한 경험과 자료들이 사장 된다. 그래서 초선 의원에 대한 연수나 교육을 의원직을 지내면서 많은 노하우가 쌓인 분들이 직접 하는 것을 만들고 싶다. 다음에도 당선되면 이 사업을 꼭 해보고 싶다. 간사도 두고 정착할 수 있게.

 

시민사회와 최종 목적이 비슷한데 시민단체에 바라는 점은 무엇인가요.

 

 지금 도봉구내에 진정한 시민단체가 있나하는 의문이 있다. 박원순 시장 하에서 시민단체가 많이 제도화되었다. 시민사회 역할과 저변이 더 발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그렇게 된 것이지 단체가 부족하고 어려워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건 시민단체를 공격하려고 하는 얘기이다. 우리 안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바를 더 빠르게 잘 이룰 수 있는 구조이다. 시민단체가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야할 때는 균형감을 가지고 내야한다.

 

도봉 시민협력플랫폼에 대한 조언을 해주세요.


 굉장한 변화를 느낀다. 지역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지치고 소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업에 실패하더라도 사람관계만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NPO동북권 지원센터가 만들어지면 민민간에서 역할할텐데 시너지 효과가 날 것 같다. 공무원, 행정과 반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활동가들이 많이 지치는데 성찰의 시간과 활동가들 간의 네트워크도 잘했으면 좋겠다.


다섯 번째 커피 한 잔. 

117일 화요일 오후2시 외대앞 스타벅스에서 정보연 선배님을 만났다.



 

지역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시나요.

 

 운동권 학생으로서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 때 운동을 했었고 자연스럽게 시민사회운동으로 연결되었던 것 같다. 천성적으로 돈버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주에는 아주 돈이 없지는 않다고 한다. 10-15년 동안은 남과 다른 삶을 사는 게 불편했다. 혼자 다른 길을 가는 게 외롭고 불편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아빠의 직업을 물으면 시민활동가라고 답하는 게 어색했다. 지금은 큰 딸아이의 선생님이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시민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신 것 같다. 아이를 통해 그에 대한 내용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도봉구 안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셨는데 학생운동 이후 직장을 다니다가 시민활동을 하셨는지.

 

90학번으로 재수를 했었다. 초창기에는 힘들었다. 학생운동과 시민활동은 차이가 있다. 도봉청년회를 만들었지만 고립된 섬의 느낌이었다. 통로가 없었다. 2년간 별다른 활동 없었다. 강좌 등으로 관심을 모아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당시 북한에 아사자가 많아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교회, 사찰, 성당, 가게 등에 들어가 후원금을 모았다. 김연순, 송건, 임성규 등 지역의 시민운동가가 모이기 시작했고 주민과 접촉하였다.

도봉푸른청년회가 진보정당을 지역에서 준비하자고 의결하였다.

풀뿌리주민운동을 통해 시민과 소통하면서 개인적인 생각이 바뀌었다. 운동권에서 볼 때 수준이 낮지만 깊이가 있었다. 진보정당 활동가에서 시민운동가로 전환하고 운동가로서 좋은 경험을 했다. 높은 가치로 위에 있는 것보다 시민 속으로 들어가 개척교회처럼 활동하는 것이 좋았다.

도봉푸른청년회의 정체성이 조금씩 바뀌었다. 도봉푸른청년회가 1996년에 창립하여 1999년에 해산했다. 2000년도에 도봉시민회로 이름과 성격이 바뀌었다. 현재는 회원으로만 남고 활동가는 별로 없는데 도봉시민회는 주부활동가로 구성되었고 주부 3명이 반상근 활동가로 시작했다. 눈부신 활동을 했고 활동의 폭도 넓어졌다. 지역의 주인은 주부다. 민우회를 통해 주부들을 통해 지역 활동하는 것을 배웠다.

생활은 아내의 수입과 강의로 인한 수입으로 했다. 2015년에는 찾동에서 활동했다.

시민이 나의 종교이고 시민회는 나의 분신이다.

 

일 년 동안 활동을 쉴 때 외로웠나요.

 

 많이 외로웠다. 젊은 남자들이 활동 하게 조언해주고 싶었는데 대부분의 활동가가 주부였다. 더 보살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속 얘기를 잘 하지 못했다. 나를 제대로 다 오픈하지 못했다.

 

시민회 활동 외 다른 영역의 활동은 어떤 것을 하셨나요.

 

 도봉구 구의원 활동을 해봤다. 구의원 출마 해보면 재미있다. 작은 정치라 부담도 적다. 시민활동과는 다른데 시각을 넓히는데 도움이 된다. 구의원 한번 했는데 아직도 공무원들이 구의원으로 부른다. 이런 부분에서 도움이 되는 것도 있더라.(웃음^^) 28살 젊은 나이에 구의원을 해서 좋게 보인 측면이 있었다. 선거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민주당 공천을 받았지만 공천력이 없는 곳에서 당선이 되었다. 당시에는 무보수 자원봉사여서 당선되기 쉬웠던 것 같다. 좋은 경험이었다. 구의원하니까 여기저기 참여할 수 있었고 방아골 복지관과 연계된 활동도 하고 북한돕기운동 등 다양한 활동에 개입할 수 있었다.

초안산 생태공원 투쟁을 했는데 당시 사유지에 골프 연습장을 짓는 거여서 짓지 말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당시 민우회가 주민 편에 서서 생태 살리기 운동을 했다. 민우회가 당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구의원들과 구의회 동원해서 건축법을 엄격히 들이대면서 골프연습장 건설 중단을 이끌어냈다. 이후 시에서 부지를 사도록 했다. 권력이 있으니까 해결이 되더라.

 

다양한 이해와 입장을 어떻게 담아내려고 노력하셨나요.

 

 40대 이하 구의원은 거의 없었다. 당시 김용석(현재 시의원)의원과 나는 정치적 고려보다는 주민의 편에 서서 판단했다. 재선의원 그룹들이 우리의 의견을 뒷받침해주었다. 그래서 당에서 요청하는 정치적인 것들 잘 받지 않았다. 당에서 미움도 받았지만 다시 출마할 생각이 없었기에 괜찮았다.

 

당에서 어떤 것을 요청했나요.


 당시에 당 원로가 지역신문 사주였다. 지역신문을 확대하는데서 필요한 지원이라든가 건설을 하는데 해서 필요한 지원 등을 요청했다. 이권 개입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일개 구의원도 파워가 크더라. 계속 구의원 하다가는 자신을 망칠 것 같아서 그만뒀다. 구의원 활동 내내 원칙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보람되고 자랑스럽다.

활동 당시 발바닥 공원을 조성했다. 발바닥 공원 부지에 무허가 판자촌 30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매일 그분들과 먹고 자고 하면서 설득했다. 판자촌에 살던 분들 잘 나가게 하고 발바닥공원을 조성했다. 그 때 그분들이 너무 고맙다고 하면서 100만원을 주시더라. 마음만 받고 100만원은 다시 돌려드렸다.(웃음^^)

 

구의원 끝나고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도봉푸른청년회와 도봉시민회에서 활동했다. KYC 전국청년단체에서도 활동했다.

 

활동비는 어떻게 하셨나요.

 

활동비는 없었다. 주로 당 일을 하면서 받고 아내가 생계를 책임졌다.

 

결혼은 어떻게 하셨나요.

 

대학 졸업 후 바로 결혼했다. 27살이었다. 결혼하고 청년회 활동을 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출마했었다.

 

도봉시민회 첫 반상근 활동가 세분의 주부들은 어떻게 교육하셨나요.

 

세분 중 두 분은 시민활동 경험이 있었다. 나머지 한분은 도봉시민회에서 운영하는 정보화교육 프로그램 수강자였다. 정보화교육은 1기가 2기를 전기수가 다음 기수를 교육하는 방식이었다. 정보화 교육을 통해 좋은 분들이 도봉시민회에 들어왔다. 도봉시민회는 다른 단체와 달리 어떤 가치를 위해 들어오기보다는 도봉시민회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가입하게 된다. 더 풀뿌리에 가깝다.

 

지역을 떠나고 다시 활동하게 된 계기는

 

암투병하면서 양평에 있는 산에서 3년을 살았다. 3년 지나니까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활동하고 싶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활동을 하고 싶었다. 당시 박원순 시장 때였는데 개인적 친분도 있어서 시 찾동 지원센터에서 근무했다. 2015년은 주32016년은 주4일 출근했다.

 

활동하면서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고 극복은 어떻게 하셨나요.

 

일과 관련되어 힘들었던 것은 주민에 대한 기대, 공적인 활동에 부응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배반당했을 때이다.

산에 들어갔을 때 도봉시민회 내부에 어떤 지위를 두고 분쟁이 발생했다. 내 분신 같은 존재인 것이 무너지는 느낌, 내 커리어가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믿었던 곳이다 보니 상처가 되더라. 단체에서 분쟁이 생기고 신뢰가 떨어지면 사람들이 떨어져나가고 단체는 망하게 된다. 극복을 산에서 도 닦으며 했다.(웃음^^)

 

내가 제일 잘 한 활동은 무엇이고 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하실 건가요.


 내가 제일 잘 한 것은 모르겠다. 암 투병 한 지 3년 지나니까 슬슬 심심해지더라. 현장에서 활동하는 친구들 보니까 재미있을 것 같고 질투도 나더라. 도화지 펼쳐놓고 하고 싶을 것을 써봤다.

시민이니셔티브. 주민이 공공의 주인이 되고 주민이 설계하고 주도하는 사회, 마을계획을 하고 싶다. 그리고 사회치유프로그램을 하고 싶다. 내안에 있는 불안감을 치유하고 싶은 마음도 작용한 것 같다. 사회치유가 어떤 것인지 정의하고 만드는 역할을 하고 싶다. 사회 진단부터 해야 한다. 종교가 하지 못하는 사회치유를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아내가 교사인데 요즘 아이들이 공격성이 크다고 하더라. 이러한 공격성은 교육보다 치유가 필요하다.

 

시민력 강화에 대한 조언 해주세요.

 

 그 길을 잘 찾으셔야.(^^)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는 시민사회를 통해서 지역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현재는 단체를 통하지 않고도 지역 활동을 할 수 있다. 지금 베이스는 단체를 염두에 두지 말고 제3지대를 염두에 두고 장을 열었으면 한다. 단체들은 자기 단체성격에 좀 더 깊숙이 파고들고 정치력을 높이는데 집중해야 한다.

주민은 교육을 통해 변화되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게 지원하여 역량 강화해야한다. 일정한 자산을 지원하여 스스로 해볼 수 있게 하는게 좋을 것 같다.

 

네트워크 사업할 때 유의할 것은 무엇인가요.

 

 네트워크를 하면서 뒷담화하지 말자. 북한 동포 돕기 운동할 때 자기 단체 활동보다 모이는게 재미있었다. 그런데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뒷담화를 하더라. 뒷담화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된다. 부정적 에너지보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휘했으면 좋겠다. 부족함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끌어내줬으면 한다.

네트워크가 능력 밖에 많은 일을 하려고 욕심을 내고, 몇몇 단체들만 성과를 가져가려고 하면 일이 틀어진다. 초창기에는 부담할 수 있을 만큼 하는 것이 좋겠다.

 

변화된 시대에 흐름에 맞게 후배활동가들에게 조언해주세요.

 

 각자하고 싶은 것을 해라. 많이 접해보면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알게 될 것이다. 활동가들에게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한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옛날 운동권 방식이다.

활동가들은 자기 중력,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주민운동에서는 비합리적인 모순에 대한 정의감만으로 주민을 끌어당기는 것이 많지 않은 것 같다. 활동가가 자기만의 향기로 사람들을 끌어당겼으면 좋겠다




세번째 커피 한잔. 

111일 수요일 오전10시 도봉구의회 2의원실에서 유기훈 선배님을 만났다. 


 

활동하게 된 계기, 동기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해서 사회복지사로 20년 활동했다. 현재는 구의원으로 활동한지 4년차가 되었다. 도봉에 오기 전까지 다른 구 세 곳에서 사회복지사로 있었다. 마지막구가 동작구였는데 거기서만 5년을 활동했다. 당시 살았던 곳과 구로구가 멀어서 고민하던 차였다는데 때마침 도봉구에 사회복지사 모집 공고가 났고, 2001년도부터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이하 방아골복지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도봉, 강북이 분구되기 전에 15년정도 강북쪽에서 살았기 때문에 도봉이 낯설지 않았다. 그때 당시 방아골복지관은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가치를 추구했다. 대부분의 종합사회복지관이 지역사회에서 고립되는 편이었는데 방아골복지관은 다른 복지관과 달랐다. 팀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사회의 많은 단체들을 만나게 되었고 지역행사도 많이 다니게 되었다.

2006년 도시넷(도봉시민사회도시네트워크)을 기획하면서 파견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도시넷 활동하면서 많이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각 단체마다 자기 활동으로 바쁘다보니 누군가 네트워크의 중심을 잡고 만들어가는 것을 원했고 그래서 도시넷 사업을 하게 되었다. 도시넷 활동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 같았다. 도시넷 활동은 지역사회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계기였다. 도시넷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시 복지관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확실치 않은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도시넷 프로젝트가 끝나고 복지관에 복귀해서 활동했다.

그리고 후보를 제안 받고 고민하다가 후보를 결심하고 지금 구의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도시넷 활동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의미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민민협력사업은 사업이 끝나면 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사업하기 위해서 만나는 건 좋지만 만나면 단체마다 일이 주어지니까 만나기 꺼려지게 되는 게 있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필요하긴 한데 누군가 대신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도시넷 활동하면서 단체들의 필요와 요구를 수렴하여 여러 사업과 행사를 많이 진행했다.

 

네트워킹할 때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나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함께 네트워킹해도 각자 단체마다 자신들이 좀 더 빛나 보이고 싶어 한다. 공동모금회에서 도시넷 사업을 지원할 때 사회복지분야에 중심으로 지원하려고 했는데 단체사업은 복지 분야가 아니고 사업성과는 내야하고 자칫 잘못하면 사업이 엎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단체들 만나면서 단체마다 성격과 사업을 파악했고 성과를 남길 수 있게 실무진들이 사업했다. 단체들의 서로 다름이 조화롭게 갈 수 있도록 실무진들이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파악한 사업이 성과를 남길 수 있도록 함께 수정, 보완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 때 주부들이 자발적으로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사업을 진행했다. 초록나라도서관, 생글도서관 등. 작은 도서관 사업 소 컨소시엄을 만들어서 필요한 교육을 진행하고 도시넷과 매칭해서 사업 기획하고 예산 지원하는 형태로 사업을 했다.

 기관들은 일이 많고 사업이 자기 성과로 되지 않기 때문에 네트워킹을 꺼려한다. 그래서 기관마다 인력자원을 지원해서 지역사례관리 사업을 함께 했다. 기관들은 이러한 계기로 묶어냈다. 관에서 사찰까지 할 정도로 당시에 도시넷사업 협조를 안해줬는데 이전에 관계를 맺었던 사람, 기관들이 협조해준 덕분에 통합사례관리 시스템을 만들 수 있었다. 도시넷 사업 끝내면서 통합사례관리 시스템을 관에 다 넘겨주었다. 지금도 그 때 만들었던 통합사례관리 시스템으로 관리되고 있어서 보람된다.

 단체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함께 일하는 귀찮음 4면 성과가 6이 되도록 하는게 중요하다. 그리고 매순간 사람관계마다 진심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지원해줄 수 있는 자원이 있어야 한다.


활동하면서 위기나 힘들었던 점이 있었나요.

 

 기관들이 사업을 다 자기성과로만 남기려고 하는 것이 어렵다. 방과후 수업들 연계하는 네트워크사업을 했다.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하기 위해 교육할 수 있는 자원과 교육을 받고 싶어하는 자원을 파악했다. 자원박람회를 열어서 이 둘을 연결해줬다. 현황이 어려운 단체를 지원하는 것도 어려웠던 것 같다.

 

위기 극복은 어떻게 하셨나요.

 

 각 단체들하고 차 마시고, 술 마시면서 관계를 맺었다. 관계를 맺으면 하나의 자원이 되어서 성과를 만들어내는 과정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 이런 관계들이 위기마다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이다.

 

자원 수집과 공유를 어떻게 했나요.

 

 인트라넷을 열어서 항목별로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네트워킹은 시공간을 넘어서 해야 한다. 단체별 행사 정보를 다 받아서 일정을 조율하고 공유했다. 도시락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메일링 서비스도 진행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찾아서 해주면 된다. 도시넷 사업 종료시점에는 신생 단체들이 알아서 찾아오기도 했다. 아쉽지만 도시넷 사업종료하게 되었다. 이후 도봉사람들을 만들었다. 재정적 지원이 없고 개인의 헌신으로 사업을 하다 보니 어렵게 활동했다.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요.

 

 의무와 권리가 공존되어야 한다. 투입 없이 성과만 바라기만 하면 안된다. 꼭 투입을 해야한다. 네트워크하는 단체끼리 각자 일을 나눠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전담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자원 확보가 중요한 것 같다.

 

활동가들에게 해줄 조언이 있으신가요.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했으면 한다. 기관이나 행정은 최고관리자를 사업해야 밑이 움직일 수 있다. 공동의 사업을 하다보면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는 큰 기관이나 큰 단체들이 일을 많이 하게 된다. 각각의 현황에 맞게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넓은 마음과 유연한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사회복지사, 네트워크 실무자, 구의원을 거치면서 시민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달라졌나요.

 

 맨처음 사회복지사로 단체 활동가들을 만났을 때는 사업방식이 너무 루즈한 것 같고 활동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사업하면서 약간 미울 때도 있었다.(웃음^^) 월급을 받고 일하면서 스킬을 가진 행정기관이 주민에게도 똑같은 스킬을 요구하면 안되는 것 같다.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요구와 이해를 조율하는게 어렵다. 행정부가 답답할 때도 있지만 헌신적인 공무원도 많다. 행정부에 비굴하게 굴 필요도 없지만 갑질을 해서도 안된다. 언제 어디서든 다르게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사람관계를 진심으로 잘 맺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정말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활동가 중에서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배려하는 방식과 언어로 상대방을 대했으면 좋겠다.

 

도봉시민협력플랫폼 사업에 조언을 해주세요.

 

 성과를 향해 가는 길에 다양한 방법과 길이 있다. 내가 납득이 안가도 상대방이 원하는 길로 갈 수 있었으면 한다. 상대방은 좋은 길, 나는 궂은 길로 가겠다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 공동 주최, 주관하는 사업은 단체명 하나를 쓰는데도 신경을 써서 해야 한다. 예산 심의하다보면 누군가에는 꼭 필요한 사업이 누군가에게는 할 필요가 없는 사업으로 되더라. 이것을 조율해서 되게 하는 게 어려운 것 같다. 잘 해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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