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도봉구시민협력플랫폼입니다.

민간단체간의 네트워크초석을 마련하고 활동가들의 역량강화를 위한 첫 시작으로 리더십 진단강의를 마련하였습니다. 리더십 진단을 통해 나를 알고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이해하며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민간단체간의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함께 하시길 기대합니다.

활동가 역량강화 교육에 참가하실 분들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셔서 신청서를 작성해주시면 됩니다. 선착순 15명 모집 마감합니다.


신청서 작성하러 가기>

https://goo.gl/forms/yQ259wxIAJBaFIm33


문의>> 010. 2389.4481 임국희




여덟 번째 커피 한 잔

119일 목요일 오후1시에 평화문화진지에서 김낙준 선배님을 만났다.




활동하게 된 계기와 동기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대학시절 환경에 관심이 많았다. 화학과라 화학물질을 많이 접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배우자가 공무원시험을 준비 한다 해서 같이 준비했는데 나만 붙었다. 면접을 보러 갔더니 남성이 매우 적었다. 면접 본 남성들 대부분이 뽑혔다.

공직생활을 경험상으로 1년만 해보려고 한 것이 3년이 되고 5년이 되었다. 당시 공무원 동기들과 안 좋은 관행들을 없애보자고 결의했다. 공무원은 한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게 되어 있다. 8년간 도봉구에 있다가 노원으로 옮겨갔다. 노원으로 가서 중랑천 사람들이라는 시민단체 함께 만들고 중랑천 관련 일들을 많이 했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직생활을 그만 두었다.

녹색후보들이 지방선거에 출마하려고 하던 계기와 시민후보를 지방선거에 출마시켜보자고 한 것이 맞아서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지금은 어려운 환경이지만 당시 방학3동에 출마해서 시민활동가들과 맨투맨으로 주민들 만나서 당선될 수 있었다. 2006년에 지방선거가 중선거구제로 바뀌면서 소수정당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출마하고 당선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었다. 출마했을 때 주민들이 시민후보들은 한번만 출마하고 그만 할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꼭 재선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의원활동하면서 이 활동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제기하고 비판, 비난하는 직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원활동을 한 것은 아랫세대가 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 것인데 이 일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의원을 그만두고 가장 먼저 한 것은 나무야 카페를 오픈한 것이었다. 그 당시에 열린 주민커뮤니티 공간이 없었다. 나의 책무라는 생각이 들어 빚까지 얻어 오픈했다. 지금은 도서관 속 별난학교라는 지역아동센터에 공간을 주고 그 건물 3층으로 이사했다. 3층에 창업지원센터를 운영 중인데 그 옆으로 나무야 카페 공간이 이동했다.

도봉에서 자라고 도봉에서 많은 역할을 하다 보니 도봉을 넓은 시야로 보게 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졌다. 미선이효순이사건 같은 사회적 이슈에 집중하려고 학습모임하면서 지역사회통합 이슈와 비전을 논의했다. 예전에는 문화영역에 관심이 많았다면 지금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50+세대들과 건강관련 프로그램하려고 한다.

공동모금회의 지역사회 네트워크를 통한 지역사회 복지가 목표인 도시넷 활동도 했다. 지금의 혁신교육 분야인 방과후학교 연결사업, 사례관리(찾동사업으로 제도화), 우리지역사회네트워크, 활동가 스터디 등을 했다. 활동가 스터디는 활동가들이 직접 기획하고 교육 받을 수 있는 방식, 퍼실리테이터 방식으로 시도했다.

박원순 시장 당선 후 서울시에서 마을공동체사업 하게 되었다. 이 때 지역에서 활동하던 핵심인사들이 서울시 중앙으로 많이 진출했다. 이동진 구청장 취임 후 다시 도봉으로 오게 되었다.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마을공동체, 사회적기업 등의 가치사업이 지역에서 잘 수행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지역에서 이러한 가치사업을 만들어보려고 서울시에서 나왔다.

말이 길어졌는데, 그래서 활동하게 된 계기는(웃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살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그렇게 살아왔다.

 

도시넷 활동에서 중점적으로 고려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도봉구 시민사회네트워크의 시작은 정보연이라 생각한다. 처음 만남이 인상 깊었는데 어느 날 푸른청년회라는 간판이 생겨서 가봤다. 사무실에 청년들 몇이 앉아있더라. 그냥 인사하고 나왔다.(웃음^^) 북한동포돕기운동으로 첫 네트워크를 시작했다. 북한동포돕기운동 실무진을 구성해서 도봉시민회 만들었다. 당시에는 사회적 이슈들로 이슈파이팅을 했다. 수락~불암 간 관통도로 건설 반대 투쟁, 효순미선이 투쟁 등을 했고 협의회 수준으로 진행하였다. 관심 있는 사안이면 참여하고 관심 없으면 빠지는 식으로 느슨한 형태로 운영하였다. 2002년 차없는거리를 시작으로 지역이슈를 함께 하게 되었다. 실무기관이었던 도봉시민회는 시민단체로 성격을 바꾸고 단체들이 돌아가면서 협의회의 대표기관과 실무를 담당했다.

네트워크의 시작 관점은 참여단체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놓을 수 있는 질과 양이 다름을 이해해야 한다.

도시넷하면서 시민력이 강화되었다. 최선기 구청장이 취임하면서 당시 임성규 방아골볼지관장을 해임시켰다. 그것을 계기로 방아골복지관에 노조가 생겼다. 도시넷 사업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시민사회에 다양성이 등장하고 많은 부분 제도화된 상황에서 어떻게 시민사회를 모아낼지 조언이나 팁을 알려주세요.

 

보통의 네트워크는 서로 공통된 부분들이 연결되어 있다. 지금 시민협력플랫폼의 구조는 컨소시엄 단체들이 모여서 네트워크를 만드는 구조이다. 실무진도 컨소시엄 단체에서 나온 구조인데 그러면 네트워크가 확장되기 어렵다. 도시넷의 경우 기획 단계부터 확장성을 염두에 두고 네트워크 실무진을 구성했다. 청년영역, 시민사회네트워크 영역, 복지 네트워킹 영역 이렇게 말이다. 실무진들이 자기 단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부문으로 접근해야 네트워크 관계망을 짜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네트워크 하려면 사람들이 만나게 해주어야 한다. 실무진들이 권한을 갖고 결정할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

 

마을공동체 사업의 경우 중앙에서 기획하고 설계할 때와 지역에서 실행할 때 관점의 차이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기획은 머릿속에서 상상해보는 것이다. 지역은 시범지 역할을 한다. 성패사례분석해서 다시 시도하려고 했는데 1차례 시범하고 바로 사업을 오픈했다. 그래서 사업의 문제점도 있다. 준비되지 않은 주민이 모임을 조직하고 활동가로 성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처음 이 사업을 제기했을 때는 시민단체 몇몇을 롤모델로 세워보려고 했었는데 시민사회사업이라는 공격을 받을까봐 하지 못했다. 박원순 시장의 혁신적인 계획의 성과는 지역 곳곳에 시민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변화된 시대 활동가들에게 조언을 해주세요.

 

과거 80년대 대학생 때는 민주화시대 대의를 위해 사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관계 맺을 때 상대방의 관심사나 나와 연결이 어느 정도 맺어있는지 파악해라. 접근방식도 예전과는 달라져야한다. 옛날에는 헌신하면 됐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고민해야 한다. 오히려 느슨한 네트워크 형태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도봉구 시민협력플랫폼에 대한 조언과 당부의 말씀해주세요.

 

모든 사업의 결과와 과정이 모두 성과일 수 없다. 어떤 사업을 결과가 성과적일 수 있고 어떤 사업은 과정이 성과적일 수 있다. 이 모두가 조화롭게 갈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건물을 시공할 때도 1차 준공 후 2, 3, 4차 준공의 과정이 있는데 하나의 결과 모든 사업을 기획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카이빙 기능을 잘 수행했으면 좋겠다. 모든 사업의 과정과 결과가 잘 기록되었으면 한다. 시민협력플랫폼 이후까지 계획하여 사업했으면 한다. 이 사업으로 무엇을 이룰 것인지 명확히 했으면 한다


일곱 번째 커피 한 잔

118일 수요일 오후430분에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 관장실에서 한상진 선배님을 만났다.


 


 

복지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대학 다닐 때 학생운동하면서 송건, 임성규 등과 선후배로 만났었다. 대학 졸업 후 인천에서 활동했다. 1997년에 도봉의 청년회와 여성민우회 등의 몇몇 활동가분들이 복지와 시민운동을 결합한 법인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이 논의부터 참여하게 되었다. 2회 인천에서 왔다갔다하며 논의과정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방아골복지관을 오픈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위탁을 받으려고 알아보았다. 당시 사회복지법인 청십자 두레마을(김진홍 목사)로 복지관을 위탁받고 복지관 운영에 참여했다. 시민과 협력할 수 있는 법인이라고 생각했다. 방아골복지관은 다른 복지관과 시작부터가 다르다. 복지관 위탁 준비부터 계획, 개관까지 다 활동가들이 했다.

 

두레마을과 컨소시엄해서 방아골복지관을 위탁 받은 건가요.

 

두레마을에서 사무국장을 파견하고 시민사회에서도 사무국장을 파견하여 서로 소통하고 협의하는 구조였다.

 

방아골복지관에서 처음에 하신일은 무엇인가요.

처음에는 부장으로 활동했다. 두레마을이 내적으로 법인 지속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두레마을에서 임성규 목사님만 복지관 관장으로 오셔서 활동했다. 2011년부터 내가 관장을 맡았다. 시민사회와 네트워크, 협력하는 구조를 선배들이 꾸준히 만들어가는 와중에 도봉시민사랑방을 꾸리고 거기에 간사로도 활동했다. 지역사회에 뿌리박는 계기였다. 초안산 생태공원 조성 투쟁도 함께 했다.

 

지역에서 계속 활동하셨나요.

 

지역에서 계속 같이 활동했다. 시민사회가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다. 복지관은 그에 비해 재정적으로 안정감과 인력, 그리고 기획력이 있었다. 그래서 시민사회와 함께 네트워크할 수 있는 프로젝트 사업을 받아서 활동했다. 활동가 역량강화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공동모금회에서 지원받아 도시넷 사업을 했다. 복지관에서 도시넷 사업을 집행할 인력 3명 채용해서 팀을 꾸리고 2년간 시민협력에 많은 역할을 했다. 법인으로서의 역할, 즉 행정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이전에는 시민사회 활동가 역량강화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당사자(취약계층) 역량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시민력 강화와 네트워크 역할해왔는데 노하우가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노하우 없다.(웃음^^) 네트워크를 제안하는 단위는 가장 낮은 자리여야 한다. 초반에 결과적으로 실패했던 프로젝트의 대부분은 복지관이 실적 쌓으려고 이 사업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들이다. 서로간의 신뢰가 생기기전 복지관에서 미리 계획을 내오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자고 했던 사업들은 실패했다. 그래서 이후에는 기획 과정부터 협력의 구조로 바꿨다.

도봉구에 처음 생기게 된 복지관이다보니 도봉구 전체를 바라봐야하는 사업이 많았고 어려웠다. 우리의 역량을 뛰어넘는 사업들을 했었다. 한편으로 홍보에서는 큰 성과가 있었지만 활동가들의 성장이나 재미있는 일터의 기능은 수행하지 못했다. 역량이 소진되기만 했다.

관과의 관계에서 갑을관계가 되는 한계가 있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다보니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하면 탄압이 많이 들어왔다.

 

다음 복지관들과 다른 출발을 하게 된 철학은 무엇인가요.

 

나와 가치가 맞아야 참여하고 그래야 성과를 낼 수 가 있다. 가치지향을 맞게 해야 한다. 주민들이 알아야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학습조직도 하고 커리큘럼화 했다. 거기서 역량이 생겨나고 복지관을 탄탄하게 운영해 올 수 있었다.

 

지금도 그 교육과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나요.

 

지금도 운영하고 있다. 복지관에 입사하면 팀을 꾸려서 학습하고 있다. 영화보고 토론도 하고 촛불집회 참가하고 토론하고 한다.

 

법인 위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당시 한나라당 소속 구청장이었을 때, 전국최우수 복지관으로 선정도 되었던 때이다. 구청에서 법인 이사 분 중 한 분의 금고 이상의 범죄기록을 트집 잡아 위탁을 박탈했다. 그 때 임성규 관장님도 복지관을 떠나게 되었다. 집회도 하고 행정소송도 했지만 되돌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관장님을 뺀 나머지 직원들 전원이 고용 승계되었다. 시민대책위가 꾸려져서 함께 싸운 결과였다. 과정을 겪게 되니 더 주민들과 밀착해서 네트워크 하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다.

 

활동하면서 힘들었던 점이나 위기가 있었나요.

 

청소년카페인 휴카페가 있었는데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이 청소년카페가 왜 영업을 하냐며 난리를 피워서 영업을 종료하게 되었다. 청소년 이용률도 높고 영업도 잘되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힘들게 한다.

아랫세대와 가치지향을 맞춰 가는 것이 어렵다. 점점 꼰대가 되어가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고 내 생각을 주입하고 있지는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아랫세대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때 여기를 떠나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 안에서 소통이 잘 되어야하는데 그런 부분이 어렵다.

 

어떨 때 보람을 느끼시나요.

 

우리 일꾼들이 직업적 복지사가 아니라 활동가로 성장되었을 때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주민들과 같은 지향으로 연대하고 협력할 때 보람된다.

 

아랫세대에게 조언과 당부를 해주세요.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는 개인과 가족이다. 기본단위가 유기적으로 결합한 형태가 지역이다. 사업을 할 때 서비스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이 남을 수 있게 했으면 한다. 나의 생각이 옳지만은 않기에 좀 더 내려놓고 주민만남과 사업했으면 한다. 선배 활동가들이 걸어왔던 길을 잘 바라보고 가치지향이 어떠했는지 잘 이해했으면 한다.

 

다른 복지관과 좀 다른데 신입직원들의 반응은 어떠한가요.

 

채용과정에서 세계관이라든지 현실인식을 가진 인력을 채용하려고 한다. 면접에서 그렇게 뽑았는데 실제 삶과 다른 경우가 있다. 그런 점은 좀 어렵다. 신입 직원으로 들어오면 우선 복지관이 걸어온 길, 비전에 대해서 설명하고 일꾼의 비전은 무엇인지 묻고 가치지향을 맞춰가기 위한 토론의 과정들을 만들어 간다. 쉽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벽을 허무는 과정이다. 벽을 허무는 만큼 주민관계가 더 쉽게 되리라 믿는다.

 

도봉구내의 지역사업 위원으로 잘 참여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기관장이라 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업의 개수가 2개로 제한이 된다. 위원으로 참여했을 때 그것이 공격의 실마리로 되는 과정도 있었고 복지관 내에서 하는 작업이 많아 외부 활동을 잘 하지 못한다. 그리고 성향도 앞에 나서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웃음^^)

 

도봉구 시민협력플랫폼에 조업과 당부의 말씀을 해주세요.

 

방아골 네트워크 하면서 고민이 있었는데 그 고민이 또다시 되풀이 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다. 플랫폼은 머무르는 사람은 없다. 단지 타는 사람과 내리는 사람, 마중하고 배웅 나오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 본원적 의미와 방향을 잘 찾았으면 좋겠다. 시민력 강화를 위해 시민, 시민력, 시민협력에 대한 공통의 정리가 명확하게 있었으면 한다. 도봉은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장으로서 가장 좋은 곳인 것 같다. 직접 민주주의의 실험들이 많이 되고 그 경험들이 쌓였으면 좋겠다. 전체보다는 부분, 작은 단위들의 공동체, 커뮤니티를 많이 생산해내는 방식으로 했으면 좋겠다. 욕구가 필요가 되게 하고 그 필요가 실현되게 하는 곳으로 도봉 시민협력플랫폼이 기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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