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커피 한 잔. 

117일 화요일 오후2시 외대앞 스타벅스에서 정보연 선배님을 만났다.



 

지역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시나요.

 

 운동권 학생으로서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 때 운동을 했었고 자연스럽게 시민사회운동으로 연결되었던 것 같다. 천성적으로 돈버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주에는 아주 돈이 없지는 않다고 한다. 10-15년 동안은 남과 다른 삶을 사는 게 불편했다. 혼자 다른 길을 가는 게 외롭고 불편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아빠의 직업을 물으면 시민활동가라고 답하는 게 어색했다. 지금은 큰 딸아이의 선생님이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시민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신 것 같다. 아이를 통해 그에 대한 내용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도봉구 안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셨는데 학생운동 이후 직장을 다니다가 시민활동을 하셨는지.

 

90학번으로 재수를 했었다. 초창기에는 힘들었다. 학생운동과 시민활동은 차이가 있다. 도봉청년회를 만들었지만 고립된 섬의 느낌이었다. 통로가 없었다. 2년간 별다른 활동 없었다. 강좌 등으로 관심을 모아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당시 북한에 아사자가 많아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교회, 사찰, 성당, 가게 등에 들어가 후원금을 모았다. 김연순, 송건, 임성규 등 지역의 시민운동가가 모이기 시작했고 주민과 접촉하였다.

도봉푸른청년회가 진보정당을 지역에서 준비하자고 의결하였다.

풀뿌리주민운동을 통해 시민과 소통하면서 개인적인 생각이 바뀌었다. 운동권에서 볼 때 수준이 낮지만 깊이가 있었다. 진보정당 활동가에서 시민운동가로 전환하고 운동가로서 좋은 경험을 했다. 높은 가치로 위에 있는 것보다 시민 속으로 들어가 개척교회처럼 활동하는 것이 좋았다.

도봉푸른청년회의 정체성이 조금씩 바뀌었다. 도봉푸른청년회가 1996년에 창립하여 1999년에 해산했다. 2000년도에 도봉시민회로 이름과 성격이 바뀌었다. 현재는 회원으로만 남고 활동가는 별로 없는데 도봉시민회는 주부활동가로 구성되었고 주부 3명이 반상근 활동가로 시작했다. 눈부신 활동을 했고 활동의 폭도 넓어졌다. 지역의 주인은 주부다. 민우회를 통해 주부들을 통해 지역 활동하는 것을 배웠다.

생활은 아내의 수입과 강의로 인한 수입으로 했다. 2015년에는 찾동에서 활동했다.

시민이 나의 종교이고 시민회는 나의 분신이다.

 

일 년 동안 활동을 쉴 때 외로웠나요.

 

 많이 외로웠다. 젊은 남자들이 활동 하게 조언해주고 싶었는데 대부분의 활동가가 주부였다. 더 보살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속 얘기를 잘 하지 못했다. 나를 제대로 다 오픈하지 못했다.

 

시민회 활동 외 다른 영역의 활동은 어떤 것을 하셨나요.

 

 도봉구 구의원 활동을 해봤다. 구의원 출마 해보면 재미있다. 작은 정치라 부담도 적다. 시민활동과는 다른데 시각을 넓히는데 도움이 된다. 구의원 한번 했는데 아직도 공무원들이 구의원으로 부른다. 이런 부분에서 도움이 되는 것도 있더라.(웃음^^) 28살 젊은 나이에 구의원을 해서 좋게 보인 측면이 있었다. 선거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민주당 공천을 받았지만 공천력이 없는 곳에서 당선이 되었다. 당시에는 무보수 자원봉사여서 당선되기 쉬웠던 것 같다. 좋은 경험이었다. 구의원하니까 여기저기 참여할 수 있었고 방아골 복지관과 연계된 활동도 하고 북한돕기운동 등 다양한 활동에 개입할 수 있었다.

초안산 생태공원 투쟁을 했는데 당시 사유지에 골프 연습장을 짓는 거여서 짓지 말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당시 민우회가 주민 편에 서서 생태 살리기 운동을 했다. 민우회가 당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구의원들과 구의회 동원해서 건축법을 엄격히 들이대면서 골프연습장 건설 중단을 이끌어냈다. 이후 시에서 부지를 사도록 했다. 권력이 있으니까 해결이 되더라.

 

다양한 이해와 입장을 어떻게 담아내려고 노력하셨나요.

 

 40대 이하 구의원은 거의 없었다. 당시 김용석(현재 시의원)의원과 나는 정치적 고려보다는 주민의 편에 서서 판단했다. 재선의원 그룹들이 우리의 의견을 뒷받침해주었다. 그래서 당에서 요청하는 정치적인 것들 잘 받지 않았다. 당에서 미움도 받았지만 다시 출마할 생각이 없었기에 괜찮았다.

 

당에서 어떤 것을 요청했나요.


 당시에 당 원로가 지역신문 사주였다. 지역신문을 확대하는데서 필요한 지원이라든가 건설을 하는데 해서 필요한 지원 등을 요청했다. 이권 개입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일개 구의원도 파워가 크더라. 계속 구의원 하다가는 자신을 망칠 것 같아서 그만뒀다. 구의원 활동 내내 원칙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보람되고 자랑스럽다.

활동 당시 발바닥 공원을 조성했다. 발바닥 공원 부지에 무허가 판자촌 30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매일 그분들과 먹고 자고 하면서 설득했다. 판자촌에 살던 분들 잘 나가게 하고 발바닥공원을 조성했다. 그 때 그분들이 너무 고맙다고 하면서 100만원을 주시더라. 마음만 받고 100만원은 다시 돌려드렸다.(웃음^^)

 

구의원 끝나고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도봉푸른청년회와 도봉시민회에서 활동했다. KYC 전국청년단체에서도 활동했다.

 

활동비는 어떻게 하셨나요.

 

활동비는 없었다. 주로 당 일을 하면서 받고 아내가 생계를 책임졌다.

 

결혼은 어떻게 하셨나요.

 

대학 졸업 후 바로 결혼했다. 27살이었다. 결혼하고 청년회 활동을 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출마했었다.

 

도봉시민회 첫 반상근 활동가 세분의 주부들은 어떻게 교육하셨나요.

 

세분 중 두 분은 시민활동 경험이 있었다. 나머지 한분은 도봉시민회에서 운영하는 정보화교육 프로그램 수강자였다. 정보화교육은 1기가 2기를 전기수가 다음 기수를 교육하는 방식이었다. 정보화 교육을 통해 좋은 분들이 도봉시민회에 들어왔다. 도봉시민회는 다른 단체와 달리 어떤 가치를 위해 들어오기보다는 도봉시민회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가입하게 된다. 더 풀뿌리에 가깝다.

 

지역을 떠나고 다시 활동하게 된 계기는

 

암투병하면서 양평에 있는 산에서 3년을 살았다. 3년 지나니까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활동하고 싶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활동을 하고 싶었다. 당시 박원순 시장 때였는데 개인적 친분도 있어서 시 찾동 지원센터에서 근무했다. 2015년은 주32016년은 주4일 출근했다.

 

활동하면서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고 극복은 어떻게 하셨나요.

 

일과 관련되어 힘들었던 것은 주민에 대한 기대, 공적인 활동에 부응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배반당했을 때이다.

산에 들어갔을 때 도봉시민회 내부에 어떤 지위를 두고 분쟁이 발생했다. 내 분신 같은 존재인 것이 무너지는 느낌, 내 커리어가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믿었던 곳이다 보니 상처가 되더라. 단체에서 분쟁이 생기고 신뢰가 떨어지면 사람들이 떨어져나가고 단체는 망하게 된다. 극복을 산에서 도 닦으며 했다.(웃음^^)

 

내가 제일 잘 한 활동은 무엇이고 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하실 건가요.


 내가 제일 잘 한 것은 모르겠다. 암 투병 한 지 3년 지나니까 슬슬 심심해지더라. 현장에서 활동하는 친구들 보니까 재미있을 것 같고 질투도 나더라. 도화지 펼쳐놓고 하고 싶을 것을 써봤다.

시민이니셔티브. 주민이 공공의 주인이 되고 주민이 설계하고 주도하는 사회, 마을계획을 하고 싶다. 그리고 사회치유프로그램을 하고 싶다. 내안에 있는 불안감을 치유하고 싶은 마음도 작용한 것 같다. 사회치유가 어떤 것인지 정의하고 만드는 역할을 하고 싶다. 사회 진단부터 해야 한다. 종교가 하지 못하는 사회치유를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아내가 교사인데 요즘 아이들이 공격성이 크다고 하더라. 이러한 공격성은 교육보다 치유가 필요하다.

 

시민력 강화에 대한 조언 해주세요.

 

 그 길을 잘 찾으셔야.(^^)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는 시민사회를 통해서 지역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현재는 단체를 통하지 않고도 지역 활동을 할 수 있다. 지금 베이스는 단체를 염두에 두지 말고 제3지대를 염두에 두고 장을 열었으면 한다. 단체들은 자기 단체성격에 좀 더 깊숙이 파고들고 정치력을 높이는데 집중해야 한다.

주민은 교육을 통해 변화되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게 지원하여 역량 강화해야한다. 일정한 자산을 지원하여 스스로 해볼 수 있게 하는게 좋을 것 같다.

 

네트워크 사업할 때 유의할 것은 무엇인가요.

 

 네트워크를 하면서 뒷담화하지 말자. 북한 동포 돕기 운동할 때 자기 단체 활동보다 모이는게 재미있었다. 그런데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뒷담화를 하더라. 뒷담화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된다. 부정적 에너지보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휘했으면 좋겠다. 부족함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끌어내줬으면 한다.

네트워크가 능력 밖에 많은 일을 하려고 욕심을 내고, 몇몇 단체들만 성과를 가져가려고 하면 일이 틀어진다. 초창기에는 부담할 수 있을 만큼 하는 것이 좋겠다.

 

변화된 시대에 흐름에 맞게 후배활동가들에게 조언해주세요.

 

 각자하고 싶은 것을 해라. 많이 접해보면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알게 될 것이다. 활동가들에게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한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옛날 운동권 방식이다.

활동가들은 자기 중력,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주민운동에서는 비합리적인 모순에 대한 정의감만으로 주민을 끌어당기는 것이 많지 않은 것 같다. 활동가가 자기만의 향기로 사람들을 끌어당겼으면 좋겠다




세번째 커피 한잔. 

111일 수요일 오전10시 도봉구의회 2의원실에서 유기훈 선배님을 만났다. 


 

활동하게 된 계기, 동기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해서 사회복지사로 20년 활동했다. 현재는 구의원으로 활동한지 4년차가 되었다. 도봉에 오기 전까지 다른 구 세 곳에서 사회복지사로 있었다. 마지막구가 동작구였는데 거기서만 5년을 활동했다. 당시 살았던 곳과 구로구가 멀어서 고민하던 차였다는데 때마침 도봉구에 사회복지사 모집 공고가 났고, 2001년도부터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이하 방아골복지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도봉, 강북이 분구되기 전에 15년정도 강북쪽에서 살았기 때문에 도봉이 낯설지 않았다. 그때 당시 방아골복지관은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가치를 추구했다. 대부분의 종합사회복지관이 지역사회에서 고립되는 편이었는데 방아골복지관은 다른 복지관과 달랐다. 팀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사회의 많은 단체들을 만나게 되었고 지역행사도 많이 다니게 되었다.

2006년 도시넷(도봉시민사회도시네트워크)을 기획하면서 파견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도시넷 활동하면서 많이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각 단체마다 자기 활동으로 바쁘다보니 누군가 네트워크의 중심을 잡고 만들어가는 것을 원했고 그래서 도시넷 사업을 하게 되었다. 도시넷 활동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 같았다. 도시넷 활동은 지역사회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계기였다. 도시넷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시 복지관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확실치 않은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도시넷 프로젝트가 끝나고 복지관에 복귀해서 활동했다.

그리고 후보를 제안 받고 고민하다가 후보를 결심하고 지금 구의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도시넷 활동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의미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민민협력사업은 사업이 끝나면 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사업하기 위해서 만나는 건 좋지만 만나면 단체마다 일이 주어지니까 만나기 꺼려지게 되는 게 있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필요하긴 한데 누군가 대신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도시넷 활동하면서 단체들의 필요와 요구를 수렴하여 여러 사업과 행사를 많이 진행했다.

 

네트워킹할 때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나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함께 네트워킹해도 각자 단체마다 자신들이 좀 더 빛나 보이고 싶어 한다. 공동모금회에서 도시넷 사업을 지원할 때 사회복지분야에 중심으로 지원하려고 했는데 단체사업은 복지 분야가 아니고 사업성과는 내야하고 자칫 잘못하면 사업이 엎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단체들 만나면서 단체마다 성격과 사업을 파악했고 성과를 남길 수 있게 실무진들이 사업했다. 단체들의 서로 다름이 조화롭게 갈 수 있도록 실무진들이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파악한 사업이 성과를 남길 수 있도록 함께 수정, 보완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 때 주부들이 자발적으로 작은 도서관을 만드는 사업을 진행했다. 초록나라도서관, 생글도서관 등. 작은 도서관 사업 소 컨소시엄을 만들어서 필요한 교육을 진행하고 도시넷과 매칭해서 사업 기획하고 예산 지원하는 형태로 사업을 했다.

 기관들은 일이 많고 사업이 자기 성과로 되지 않기 때문에 네트워킹을 꺼려한다. 그래서 기관마다 인력자원을 지원해서 지역사례관리 사업을 함께 했다. 기관들은 이러한 계기로 묶어냈다. 관에서 사찰까지 할 정도로 당시에 도시넷사업 협조를 안해줬는데 이전에 관계를 맺었던 사람, 기관들이 협조해준 덕분에 통합사례관리 시스템을 만들 수 있었다. 도시넷 사업 끝내면서 통합사례관리 시스템을 관에 다 넘겨주었다. 지금도 그 때 만들었던 통합사례관리 시스템으로 관리되고 있어서 보람된다.

 단체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함께 일하는 귀찮음 4면 성과가 6이 되도록 하는게 중요하다. 그리고 매순간 사람관계마다 진심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지원해줄 수 있는 자원이 있어야 한다.


활동하면서 위기나 힘들었던 점이 있었나요.

 

 기관들이 사업을 다 자기성과로만 남기려고 하는 것이 어렵다. 방과후 수업들 연계하는 네트워크사업을 했다.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하기 위해 교육할 수 있는 자원과 교육을 받고 싶어하는 자원을 파악했다. 자원박람회를 열어서 이 둘을 연결해줬다. 현황이 어려운 단체를 지원하는 것도 어려웠던 것 같다.

 

위기 극복은 어떻게 하셨나요.

 

 각 단체들하고 차 마시고, 술 마시면서 관계를 맺었다. 관계를 맺으면 하나의 자원이 되어서 성과를 만들어내는 과정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 이런 관계들이 위기마다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이다.

 

자원 수집과 공유를 어떻게 했나요.

 

 인트라넷을 열어서 항목별로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네트워킹은 시공간을 넘어서 해야 한다. 단체별 행사 정보를 다 받아서 일정을 조율하고 공유했다. 도시락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메일링 서비스도 진행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찾아서 해주면 된다. 도시넷 사업 종료시점에는 신생 단체들이 알아서 찾아오기도 했다. 아쉽지만 도시넷 사업종료하게 되었다. 이후 도봉사람들을 만들었다. 재정적 지원이 없고 개인의 헌신으로 사업을 하다 보니 어렵게 활동했다.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요.

 

 의무와 권리가 공존되어야 한다. 투입 없이 성과만 바라기만 하면 안된다. 꼭 투입을 해야한다. 네트워크하는 단체끼리 각자 일을 나눠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전담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자원 확보가 중요한 것 같다.

 

활동가들에게 해줄 조언이 있으신가요.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했으면 한다. 기관이나 행정은 최고관리자를 사업해야 밑이 움직일 수 있다. 공동의 사업을 하다보면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는 큰 기관이나 큰 단체들이 일을 많이 하게 된다. 각각의 현황에 맞게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넓은 마음과 유연한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사회복지사, 네트워크 실무자, 구의원을 거치면서 시민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달라졌나요.

 

 맨처음 사회복지사로 단체 활동가들을 만났을 때는 사업방식이 너무 루즈한 것 같고 활동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사업하면서 약간 미울 때도 있었다.(웃음^^) 월급을 받고 일하면서 스킬을 가진 행정기관이 주민에게도 똑같은 스킬을 요구하면 안되는 것 같다.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요구와 이해를 조율하는게 어렵다. 행정부가 답답할 때도 있지만 헌신적인 공무원도 많다. 행정부에 비굴하게 굴 필요도 없지만 갑질을 해서도 안된다. 언제 어디서든 다르게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사람관계를 진심으로 잘 맺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정말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활동가 중에서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배려하는 방식과 언어로 상대방을 대했으면 좋겠다.

 

도봉시민협력플랫폼 사업에 조언을 해주세요.

 

 성과를 향해 가는 길에 다양한 방법과 길이 있다. 내가 납득이 안가도 상대방이 원하는 길로 갈 수 있었으면 한다. 상대방은 좋은 길, 나는 궂은 길로 가겠다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 공동 주최, 주관하는 사업은 단체명 하나를 쓰는데도 신경을 써서 해야 한다. 예산 심의하다보면 누군가에는 꼭 필요한 사업이 누군가에게는 할 필요가 없는 사업으로 되더라. 이것을 조율해서 되게 하는 게 어려운 것 같다. 잘 해나갔으면 좋겠다

   



두번째 커피 한잔.

1026일 목요일 오후3시 까르페디엠에서 김희정 선배님을 만났다.



선배님 소개 좀 해주세요.


 대학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했다. 여성으로서의 삶과 가치에 대한 물음들이 학생운동으로는 해소되지 않았는데 여성학 수업을 듣고 많은 의문들이 해소되었다. 바로 114에 전화를 걸어 여성단체 연락처를 문의했고 동북여성민우회를 소개 받았다. 동북여성민우회에 이력서(?)를 준비해서 방문한 첫날 김연순(당시 사무국장) 언니를 만나고 바로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에서 배우는 것이 재미없고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학교를 그만두고 동북여성민우회에서 상근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활동 시작 당시에는 활동가라는 명칭도 없었고, 개념도 생소할 때였다.

 컵라면 먹으면서 활동하는 언니들을 위해 쌀밥을 먹여주겠다는 생각으로 아름다운재단으로 옮겨가서 활동을 했다.(웃음^^) 공익적인 모금을 하는 첫 단체였고 거기에 흥미를 느끼고 활동을 하게 되었다. 활동하면서 모금을 통해 돈만이 아니라 사람이 함께 온다는 것을 깨닫게 했지만 돈이 오고 가는 지원 관계의 이면이 참 황폐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돈으로 지원하는 것은 이제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인권재단에서 몇 년간 프리랜서로 활동하다가 NPO지원센터에서 3년간 활동했다. 돈이 오고가는 관계가 아닌 사람간의 관계로 활동을 했다.

 

활동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여성학 수업이 큰 계기였다. 여성학 수업을 들으면서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이해되지 않았던 엄마의 삶과 나의 삶이 이해가 되고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민우회에서 아름다운재단으로 옮길 때 어땠는지 말씀해주세요.


 민우회는 직장이기 이전에 나의 정체성이라 생각했다. 민우회를 떠나서는 어디를 가든지 민우회는 나를 키워준 제2의 어머니, 2의 자궁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지원하는 것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셨는데 그 해답을 얻으셨나요.


 위기라고 생각하는 순간 해답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노사모의 등장을 보면서 시민단체의 역할을 다른 주체들이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다양한 주체들이 나서는데 예전의 지원 방식(특히 돈으로 지원하는 방식)으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다른 요소의 지원이 필요하고 지원의 방식도 바뀌어야할 것 같다. 종속적인 관계가 아닌 파트너, 동반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

 NPO지원센터를 운영하면서는 돈으로 지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과 중심보다 과정이 드러나보이는 지원을 했다. 연속지원을 얼마만큼 할 것인지 규정하지 않았고 지원하는 자원에 대해 자유롭게 하지만 공익적 목적에 한해서 쓸 수 있도록 했다. 공익적 목적이 어떤 것인지도 가치설정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활동하시면서 느끼는 좌절이나 어려움이 있었다면 말씀해 주세요.


 NPO지원센터 활동하면서 NGO 단체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활동가 정체성은 나의 정체성 중 하나이다. 굳이 활동가라고 명시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다른 영역을 통해 활동가 영역에 진입할 수 있다. 거버넌스, 협치 구조가 답답하고 나에게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내가 재미있는 일, 즐거운 일을 하고 싶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남아있는 동료들을 보면 미안한 생각도 든다. 끝까지 남지 않는 것, 단체 활동에서 행사나 사업의 성과를 행정적으로 요구하는 것, 모든 것을 계획한데로 만들려고 하는 것 등 인위적인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

 

지역활동, 사회혁신활동을 개념적으로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있는데요. 지역활동, 사회혁신활동의 진입을 어려워하는 청년들에게 해줄 조언이 있나요.


 지역활동, 사회혁신활동 영역에 대한 정확한 개념 설명은 어렵다. 원천기술로 접근하여 설명하면 좋겠다. 시민사회와 지역은 사람사이에 말문을 트이게 하고 참여하게 하는 원천기술을 얻게 된다. 지역활동, 사회혁신활동을 하면 바로 이러한 원천기술을 얻는 것 같다.

1세대 리더십은 단체를 넘어서 지역을 고민하는 시기였다면 2세대 리더십은 자기 단체만 들여다보는 시기인 것 같다. 단체의 역량이 부족해서 그랬다보다는 시기가 그런 것 같다. 지금의 시기는 다시 민민 단체를 넘어서 지역을 만드는 사업을 할 때이다. 개별 단체가 잘 되는 것보다 지역 전체가 잘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역차원의 문제가 잘 해결되면 단체의 유연성이 더 올라가지 않을까. 협력의 과정도 협력이 되게 하여야 한다. 계획을 세우는 과정부터 긴 시간 협의하고 협력했으면 좋겠다. 기존의 대표 리더십으로 민민 협력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단체가 있다가 없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유지되기 어렵고 힘든 단체가 유지되는 것이 이상한 건 아닌지. 모두가 어려운데 개별공간과 사람을 힘들게 꾸리고 유지하기보다는 사무실도 함께 쓰고 활동가 역량도 함께 공유하면 더 효율적일 것 같다.

 

이야기 들으면서 단체별로 사업을 공유하고 비슷한 사업은 콜라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통의 자원은 함께 이루고 이용하면 좋겠다. 예를 들면 단체마다 각각 디자이너를 두는 것은 비효율적이란 생각이다. 공동의 디자이너를 두고 활용하면 좋지 않을까.

 

활동가들에게 조언을 해주세요. (활동과 생활이 일치되지 못하는 부분)


 삶과 일의 가치 싱크로율이 높아야 되는게 이 영역이다. 실제로 그렇지 못할 때 활동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협력하자고 나서려면 그 단체의 구조부터 협력의 구조가 되어여 한다. 활동가가 컵라면을 먹으면 일이 많으니 당연한거야가 아니라 컵라면을 먹으며 일을 하는 그런 구조를 바꿔야 한다. 이런 가치부터 확실하게 해야한다.

 

자녀에게 만들어주고 싶은 세상은 무엇인가요.


 자녀들이 살 세상은 자기들이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웃음^^) 지금 활동하고 있는 단체들이 기록과 자료를 잘 남겨야 한다. 그것을 후대들이 참고해서 취사선택하여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만들어 주고 싶은 세상은 기록이 잘 되어있고 아카이빙이 잘 구축되어 있는 세상이다.


활동하는데 배우자의 지지는 어떠한가요.


 한참 활동할 때 밖에서 볼 때는 활동이 비효율적으로 느껴진 것 같다. 가족이 밤늦게까지 활동하는 것에 대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 같다.

 

끝으로 도봉구 시민협력플랫폼에 대한 기대와 당부의 말씀을 해주세요.


 중간자라는 포지션을 잘 취해야 한다. 경직되는 순간 갑이 될 수도 있다. 주변의 환경을 잘 이해하는 유연성을 가졌으면 좋겠다.


 


첫 번째 커피한 잔.

1025일 수요일 오후4시 까르페디엠에서 홍은정 선배님을 만났다.

 


활동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나 동기가 무엇이었나요.


 도봉구가 고향이다. ,,고 모두 도봉구에서 다녔다. 대학을 멀리 다니면서 집은 잠만 자는 곳이었다. 그때는 진정한 주민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다시 도봉구로 이사를 왔다. 그때 당시 민우회, 생협 등 여성 운동하는 곳이 있었다. 아이 때문에 생협을 이용하다가 민우회 활동을 하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니까 사는 지역에 자연스레 관심이 생기고 관계도 생겼다. 그제서야 진정한 주민이 된 것이다. 민우회 활동을 하면서 지역 활동도 시작하게 되었다.

 84학번이다. 대학에 들어가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고 졸업을 앞두면서 약간의 거리두기를 했었다. 지역 활동을 하게 된 계기로 학생운동을 끝까지 하지 못한 부채감도 작용한 것 같다.


 민우회 활동은 자발적으로 하셨는지, 아니면 권유로 하셨는지요.


 98년도 지방선거부터 기초의회, 기초단체장도 뽑게 되었다. 그 후로 민우회에서 기초의회 예산서 분석하는 스터디를 운영했다. 대학에서 법을 전공했는데 민우회에서 예산분석 스터디를 함께 하자고 하더라. 예산분석하면서 재미있었다.

 민우회 활동은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전에는 방아골복지관에서 주민조직사업 일환으로 진행한 주말농장에 아이와 함께 참여했었다.

 

시민단체, 지역활동하면서 활동비는 어떻게 하셨나요.


 활동비 지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자비 부담하면서 활동했다. 2007년인가 2008년인가 민우회 대표로 상근하면서 활동비를 처음 받아봤다. 그런데 받은 활동비도 사업비로 다시 다 지출했다. (웃음^^)

 

현재까지 어떠한 영역과 분야에서 활동하셨나요.


  지역 여성운동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여성운동을 지역의 문제, 생활의 문제와 결부하여 활동했다. 주민자치운동의 한 영역으로 진행한 예산분석 활동의 경우 시민단체에서 처음하는 활동이다 보니 주민 신뢰나 호응이 무척 좋았다. 여성이슈를 지역으로 끌어와서 활동했는데 면월경대 알리기, 명절 평등 캠페인, KTX 여승무원 투쟁 등을 지역에서 알려내고 함께 했다.

  지방선거에 시민후보를 내고 선거운동도 했다. 2002년도에 처음으로 2명의 시민후보(김낙준, 추경숙)를 내고 시민의 힘으로 선거의 전 과정을 만들어갔다. 선거가 지역운동에서 참 좋은 계기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였다. 2006년 선거에서는 시민후보가 모두 낙선하고, 2010년 선거에 다시 1(이창림)의 시민후보를 냈다. 비록 낙선했지만 각각 활동하던 시민단체들이 연대하고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후보를 정하는 과정에서 갈등은 없었나요.


 대체적으로 갈등 없이 정리되었다. 시민단체 활동가등 2,30명이 모여서 후보를 추천하고 하려는 의지가 높은 분으로 결정이 되었다. 후보는 공인으로서 살아야하는 어려운 자리라 후보로 나서고 결의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

 

2006년과 2010년 지방선거 모두 시민후보들이 낙선했는데 어떻게 승리적으로 평가했나요.


 2006년 선거에 패배하고 약간 의기소침해졌다. 시민후보 중 한 분이 개인사정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면서 끝까지 지역을 책임지지 않는 것에 대한 주민비판도 있었다. 이때 후보들과 주요 선거운동원들 중심으로 도봉시민사회도시네트워크(도시넷)를 결성하였다. 때마침 공동모금회에서 지역커뮤니티, 지역사례관리 지원사업을 시작한 계기도 맞아 떨어졌다. 공동모금회에서 지원을 받아 시민력 강화와 지역사례관리 결합하여 네트워크를 조성하였다. 도시넷 활동하면서 자활, 복지기관도 드러내면서 지역문제를 이슈파이팅했다. 시민단체들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서로 연대하는 이 과정은 도봉시민사회만의 독자적 경험이었다.

 2010년 선거에서 비록 낙선했지만 23%의 득표율이었다. 당선권과 얼마 차이 나지 않았다. 이때는 의정비 이슈가 있었다. 의회에서 의정비를 정하는 절차를 무시하고 결정했다. 절차를 무시한 것과 관련해 투쟁을 벌이다가 주민소송을 진행했다. 각 시민단체 대표들이 원고가 되었다. 1심에서 승소했다. 전국에서 주민소송을 진행하고 승소한 첫 사례라고 하더라. 하지만 2심과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환수를 주장했는데 근거할 관련 사례가 없었고, 이미 지급된 의정비를 반환하는게 무리라는 판단이었나보다. 지방선거와 주민소송으로 시민단체 네트워크가 더 단단해지고 강해졌다.

 활동을 하면서 주민만남의 기회가 어려웠다. 그래서 주민과 소통할 수 있는 지역신문을 만들어보자고 했고, 그렇게 민민네트워크의 결실인 도봉N이 탄생했다.

 

도봉N은 어떻게 활동하셨나요.


 도봉N 활동도 재미있게 했다. 어느 단체에도 속하지 않는 분들이 모여서, 우리집을 도봉N 사무실로 해서 활동했다. 신문을 매개로 주민들을 만나니까 피드백도 빠르고 여론형성이나 영향력이 커서 좋았다. 그런데 본업을 따로 가지고 활동하다보니 마감압박이 너무 크고 재정적 어려움 있었다. 거기에다 신문뿐 아니라 잡지, 팟캐스트, 책 등 다양한 매체도 발행하고 마라톤, 체육대회, 평화기행 등 행사도 진행했다.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쉬자고 한 것이 지금까지 쉬게 되었다.(웃음^^)

 

활동하면서 힘들었던 적은 없었나요.


 그 당시에는 힘들었겠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니 크게 힘들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활동하면서 어려움이 나섰을 때 극복은 어떻게 하셨나요.


 극복해본 적은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던 것 같다.

 

꼭 했으면 하는 것이 있나요.


 노는 것을 잘했으면 좋겠다. 상처도 사람에게 받지만 그 극복도 사람과 할 수 있다. 우리 활동이 모두 사람과의 활동이기에 그런 것 같다. 여담으로 도봉이 시민운동이 잘 된 이유는 잘 놀아서라고 한다. 놀면서 친해지고 사적으로 자주 만나야지 공적인 일도 잘 되는 것 같다. 활동하고 남는 것은 사람이더라.

 요양원 운영하면서 처음해보는 일이라 어려웠다. 민우회 등 시민단체활동 경험이 다 내공으로 쌓여있더라. 그래서 다른 일들도 잘 해낼 수 있었다. 시민단체활동은 사람을 조직하는 일이라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변화된 시대, 활동하는 후배들에게 해줄 말이 있나요.


 제대로 된 조언을 해줄 자신은 없다. 4~5년동안 시민단체활동과 떨어져있었다. 네트워크가 이제는 일반적인 개념이 되었다. 활동가의 숫자도 많아지고 저변도 넓어지게 되었다. 창의적이고 다양한 활동들을 보면서 재밌게 다가오면서도 이러한 다양함을 하나로 모아내고 끌어가는 것이 녹록히 않겠다는 생각이다. 세대가 바뀌었다. 시민사회 초창기에는 80년대 운동권 방식으로 시민운동이 일반화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양성 큰 세대다. 여기서부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러한 다양성에 잘 대처하는 시민협력플랫폼이 되었으면 한다.

 

끝으로 도봉구 시민협력플랫폼에 대한 기대와 당부의 말씀을 해주세요.


기대가 정말 크다. 도시넷을 좋은 기억으로 가지고 있어서 더 기대가 큰 것 같다. 지금은 시민협력플랫폼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이다. 예전에 시민단체가 하던 많은 일을 이제는 행정부가 하고 있다. 민의 역동성, 창의성을 발휘해서 민간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민의 영역을 행정부에 넘겨주면서 민이 행정부의 하부조직처럼 되는 우려가 있다. 민만이 가지고 있는 운동성, 역동성, 창의성을 다시 높여야 한다. 이 역할을 도봉구 시민협력플랫폼이 했으면 한다. 행사나 사업, 활동성과에 집중하지 말고 시민역량을 회복하는데 활동의 초점을 맞추기를 바란다. 시민단체의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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