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12일 너른마루에서 활동가 역량강화 시리즈 첫번째인 '리더십 그리고 팀웍' 강연이 진행되었습니다. 도봉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활동가분들이 참여하여 각자의 리더십 성향을 진단해보고, 서로의 리더십 성향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강연 시작 전 강연 취지와 시민협력플랫폼에 대해 간단하게 해설.


▲ '리더십 그리고 팀웍'이라는 주제로 강연해주시는 김은경 박사님.


 

▲ 강연 진행 모습. 


  

▲ 강연 진행 모습.


 

▲ 테스트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



▲ 진지하게 테스트에 임하는 참가자들.



늦은시간 강연에 참여해주신 참가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나에 대해 그리고 서로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소통하는 의미있는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다음 활동가역량강화 프로그램에서 만나요~^^


열 두번째 커피 한 잔 

20171213일 수요일 오후6시에 도봉구청 앞 탐앤탐스 카페에서 문경수 대표님을 만났다.


 

지역활동의 계기,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1976년에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지역에서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대학 다닐 때 노동운동을 했고, 그래서 이소선 여사(전태일 열사 어머니)와 친분이 있었다. 마침 이소선 여사가 도봉에 살고 계셔서 아이 키우면서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을 나누었다. 이소선 여사가 판자촌을 보여주며 여기서 활동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지금은 발바닥 공원으로 잘 조성되어 있지만, 그 당시 방학동 은행나무부터 방학사거리까지 이르는 방학천을 따라 1370세대의 판자촌이 있었다. 지금의 어린이집은 없던 시절이었고 탁아소도 없다 보니 아이들 보호가 전혀 되지 않았다. 판자촌 집을 하나 사서 탁아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혜영이,용철이 사건(지하 셋방에 살고 있었음.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 요강과 간식거리를 방안에 넣어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출근. 남매가 불장난하다가 방안에서 숨진 사건)으로 이슈가 되어 1991년 영유아 보호법이 제정되었고 지금의 어린이집이 생겨나게 되었다. 도봉에도 혜영이, 용철이 남매네처럼 아이를 맡길 데 없는 맞벌이 가정들은 밖에서 문을 잠그고 일을 하러 나가기도 했다. 이렇게 가슴 아픈 희생으로 7,80년대 사람들이 경제를 세운 것을 다음 세대가 잊지 않았으면 한다.

오전 7시부터 오후 8시까지 탁아소를 운영하고 아이들을 돌봤다. 당시 선생님들은 실비만 받고 근무했다. 가난한 환경에 알콜 중독인 아버지들이 거의 80%였다. 가정폭력도 심했고 아이들은 학대 받았다. 결혼식도 못 올리고 혼인신고도 못한 동거 가구도 많았다. 그래서 결혼식도 많이 올려주었다. 가정을 살리는 것이 첫 번째라 생각하여 부모교육을 했다. 시범적으로 아버지 교육을 진행했는데 첫 번째 주제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연탄을 갈아보자였다. 부모의 역할 분담이라든가, 가정을 잘 지키게 교육을 했다. 그리고 모든 행사에 절대 술을 준비하지 않았다. 판자촌은 생활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집마다 화장실과 수도시설이 제대로 없었다. 양털 자르는 부업을 많이 했는데 그래서인지 폐병 환자들이 많았다. 고려대 의대 교수님이 한 달에 한 번씩 학생들 데리고 오셔서 폐병 환자 진료와 치료를 해주었다.

사회복지 활동하면서 무료는 지양했다. 탁아소도 23명을 받아서 운영했는데 하루에 500원씩 받았다. 아이들이 크면서 학령기가 되고 학습지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창고를 수리해서 공부방도 열었다. 6,70명 정도 공부방을 이용했다. 당시 덕성여대 쿠사라는 동아리에서 공부방 운영에 도움을 많이 주었다. 보육과 교육을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를 운영했다. 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해 마을잔치도 여러번 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선생님이라는 호칭 대신 삼촌, 이모라고 부르게 했다. 아이들 낮잠시간에는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가정현황도 파악하고 대책도 마련했다. 밤에 주민교육과 회의를 많이 했다. 다른 판자촌 철거 투쟁 연대도 많이 다녔다. 한번은 복지전공에서 배운 것을 실행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주민 대상으로 수요조사를 했는데 간첩이라고 주민신고가 들어간 적도 있었다.(웃음^^)

한살림 생협 초창기 멤버다. 환경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판자촌 환경에서 가정 먼저 물을 깨끗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쓰레기를 하천에 그냥 버려서 하천 오염이 심했다. 함께 회의를 해서 펌프로 물을 길던 것을 공동 수도를 설치하고 쓰레기를 깨끗하게 처리하자고 캠페인도 했다. 비용을 내서 쓰레기도 수거해가게 했다.

공부방 이름을 함께 논의해서 뚝방 공부방에서 다솔 공부방으로 바꿨다. 판자촌 주변으로 갑자기 아파트가 엄청나게 들어섰다. 판자촌 아이들이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 싶어 하는데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이 못 놀게 하더라.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판자촌에 사는 아이들의 생활격차가 크다 보니 아이들의 상처가 컸다. 아이들이 방황이 심해지게 되니 판자촌이 우범지역이 되었다. 아이들의 일탈이 심해져서 폭력을 반대하는 평화교육을 하며 아이들의 다친 마음을 달래주었다. 95년에 동학농민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로 주민 조직해서 역사유적답사를 했다. 유홍준 교수가 이끌었는데 너무 인상 깊었다. 이것을 계기로 아이들이 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 바르게 자랐으면 해서 아이들에게 역사교육도 했다.

탁아소, 공부방 운영하면서 장학금 연결해서 아이들 학교 다니게 했다. 공부방 다니던 아이가 학교 졸업하고 다시 공부방으로 자원봉사하러 올 때 가장 보람을 느꼈다.

91년도에 영유아보호법이 제정되고 그에 따라 정부에서 새마을 어린이집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기존 탁아소들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는 공부방 운영에만 집중했고 2000년도 초반까지 운영했다.

주변아파트와 판자촌이 공존하는 것이 힘들었다. 당시 구청장이 자진 퇴거하는 집주인들에게 아파트 임대권을 주었다. 그렇게 하나둘 판자촌을 떠났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독립적인 아파트 생활을 많이 힘들어했다. 지금의 발바닥 공원을 조성하는데 판자촌 주민들의 희생이 있었다. 그러한 희생이 하나도 공유되지 않는 것이 속상하다.

판자촌을 떠나고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14년 근무했고, 현재는 성가정노인종합복지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노인복지관은 유료로 운영하고 있는데 어르신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함께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95개 프로그램을 다 재능기부로 운영하고 있다.

 

사회복지 전공과 사회혁신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동양제과에서 노동자들 월급 계산하는 총무로 근무했다. 회사 앞에 성당이 있었는데 성당에 다니면서 천주교 교리와 가치를 습득하였다. 그래서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관찰, 판단, 실천을 통해 나 자신을 많이 내려놓고 상장했다. 복지가 적성에 맞았고 배운 것을 현장에 적용하는 재미가 컸다.

 

활동하면서 어떤 위기가 있었나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사회운동을 하려고 했으면 결혼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가족, 특히 아이들의 희생이 넘 미안하다. 자녀에게 온전한 케어를 해주지 못한 것이 늘 미안하다.

활동하면서 외모를 꾸며 본적이 없다. 미용실도 46세에 처음 가봤다.(웃음^^) 사회운동하는라 멋부리는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격식에 맞게 옷을 입고 치장을 하는게 너무 어렵다.

내 인생의 좌우명이 해보기나 했어!’이다. 해보지도 않고 걱정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진정성을 담아서 일을 하면 안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어떤 일이든 원칙적으로 정직하게 일을 하고 의견을 수렴해서 진행하면 된다.

 

시민협력플랫폼에 대한 기대와 당부가 있다면 해주세요.

 

플랫폼 제 역할을 잘했으면 좋겠다. 기본에 충실히 하는 게 제일 힘들다. 본연의 목표를 잘 살려서 꼭 같이 했으면 좋겠다. 실패해도 성공해도 끝까지 함께! 그리고 결정한 것에 뒷담화하지 말고 결정된대로 하자.

 


열 한번째 커피 한 잔

128일 금요일 오후3시 동북여성민우회 사무실에서 김성희 대표님을 만났다.


 

활동하게 된 계기와 동기가 무엇인가요.

 

학창시절 모범생이었고 친구관계 중시했다. 대학을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생각했다.(웃음^^)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여자여도 꼭 대학을 가야한다 직장을 가져야한다고 말씀하셨다. 대학가서도 다른 것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대학생 시위 보면서 생각이 좀 깨졌다. 여성학 써클에 들어가서 공부하면서도 많이 깨졌다.

학생운동의 끝이 두려웠다. 공장 같은 곳에 투신하는 선배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3학년 초에 학생운동을 그만 뒀다. 바로 휴학했는데 운동 그만두고 나서도 힘들었다. 복학하고 다시 돌아와서 공부했다. 운동을 끝까지 못한 부채감이 있다.

대학 졸업하고 편지 써놓고 집을 나왔다. 성남에서 선배들과 노동 상담하려고 했다. 부모님 반대가 너무 심하셔서 결국 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서 취직공부하고 통신회사에 취직해서 20년을 근무했다. 남편도 거기서 만났다. 그러는 와중에도 운동의 끈을 놓지 못하고 운동단체 모임에 꾸준히 나갔다.

결혼 이후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에 집중했다. 그럼에도 한 켠에는 사회운동에 마음을 두었다. 아이 둘을 낳고 맡길 때가 없어서 공동육아하는 곳을 찾게 되었다. 우이동에 꿈꾸는어린이집을 알게 되고 거기서 공동육아를 했다. 그 때 남충진 선생님도 학부모로 만났다. 융가 때문에 도봉으로 이사 오게 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 민우회 회원, 생협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회원으로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그 때는 직장 다니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서 2009년에 직장을 명예퇴직했다. 여기저기서 활동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왔다. 여유롭게 살고 싶어서 다 만류하고 생글도서관 자원봉사와 오커리나 소모임 활동만 했다. 생글도서관에서 2년 동안 자원봉사를 했는데 심심하고 외로웠다. 민우회 상근활동을 제안 받았는데 처음에는 겁나고 두려워서 운영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심심하고 외롭게 있다가 여성들끼리 모여서 이야기 나누고 영화도 보고 하니까 즐겁고 재밌었다.

 

동북여성민우회 대표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2016년도부터 했다. 활동하면서 선배라는 호칭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지역에서 활동경력이 짧아서 그렇다.

 

직장인이었다가 지역활동하는데 어떠셨나요.

 

처음에는 활동이 답답해보였다. 직장은 상명하복, 효율성 중시, 성과중심이었다. 지역활동은 그와 다르게 뭐든지 의사소통을 중시하고 같이 정하는 것을 중시했다. 비효율적인 것 같았다. 그리고 함께 하기로 정한 것에 나서지 않는 모습도 답답했다. 나는 일 중심이었는데 여기는 사람중심이었다. 느리더라도 천천히 함께 가는 것이 달랐다. 매너리즘, 패쇄성 등 새로운 사람들이 활동영역에 들어가기 힘든 측면이 있다.

주민자치영역, 의회방청 예산분석활동이 재미있었다. 이런 활동하면서 구의원들과 알게 되고 네트워크 경험도 생겼다. 그래서 대표할 때 도움이 많이 되었다. 외국에는 전대표가 새로운 대표를 6개월 정도 데리고 다니면서 네트워크 맺게 해준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다.

 

시민단체 대표로서 느끼는 시민단체의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대안이 있으신가요.

 

20년 전에 활동했던 사람들이 부럽다. 예전에는 복지영역을 국가에서 감당하지 않으려고 민간영역에 다 위탁했다. 하지만 지금은 관에서 복지영역을 다시 제도화하고 있다. 시민단체도 마찬가지이다. 시민단체 영역이 많이 제도화되었다. 관이 시민단체보다 재정적으로 자원 면에서 훨씬 우월하다. 시민단체는 관보다 일이 훨씬 많지만 재정적으로 자원 면에서 부족하다.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단체를 확대하는데 집중하기보다 내부를 내실있게 다져가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민우회도 지역 여성운동에 더욱 집중해야 되지 않을까한다. 지역에서 여성주의를 더욱 이슈화해야한다.


시민단체들의 바쁨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거버넌스, 협치하면서 더욱 바빠진 것 같다. 들러리로 되지 않으려면 시민사회가 분명한 역할을 갖고 참여해야 할 것 같다. 민민의 바쁨은 공통의 작업을 함께 하면서 풀어내면 어떨까.

 

시민단체가 왜 이렇게 바쁜가요.

 

동북여성민우회도 프로젝트 사업만 5개나 한다. 많이 제도화되었어도 시민단체가 할 일이 많다. 여기저기서 사업 같이 하자고 하는 곳도 많고 프로젝트 사업을 통해 활동가 선생님들이 성장하고 싶어 해서 프로젝트 사업을 중단할 수 없다.

 

시민협력플랫폼에 대한 기대와 당부를 해주세요.

 

관과의 사업을 하다보면 관의 요구대로 해야될 때가 있더라. 우리가 하려는 것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목소리를 냈으면 좋겠다. 함께 성장했으면 한다. 특히 실무진들이 이 사업을 통해서 많이 성장했으면 좋겠다. 지역의 문제를 함께 나누고 해결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열 번째 커피 한 잔

127일 목요일 오전10시반 까페자매에서 신은옥 대표님을 만났다.



활동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나 동기가 무엇이었나요.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했다. 자주민주통일이라는 큰 꿈을 가지고 청년의 열정을 쏟아 부었다.(웃음^^) 분단의 모순, 노동자의 처지 등 사회의 모순을 바꿔보려고 했다. 대학 나와서 지역에서 민주노동당 활동을 했다. 성지윤, 김승교변호사님 등과 소수정당 활동 활동을 했다. 정당 활동을 하면서 당 해산의 아픔까지 겪었다.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서 육아문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 잘 키워 보자라고 해서 2010년에 도담공동육아협동조합 만들고 5년 동안 대표직 했다. 한 곳에 오래 있으니까 정체된 느낌도 들고 아이들도 어린이집을 다 졸업해서 다른 활동 고민 있던 참에 참교육 학부모회 활동하게 되었고 대표까지 하게 되었다.

세상을 변화시켜보자는 가치가 삶에 녹아있는 것 같다. 어린이집도 참교육학부모회 활동도 그렇게 하고 있다.

 

대학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얻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이게 우리 교육의 문제인데, 대학 가기 전까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도 갖게 될 기회가 없다. 대학 들어가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나 고민했는데 때마침 운도우건 선배를 만났다. 자기 삶과 사회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사는 선배들의 모습이 매력적이게 다가왔다.

 

학생운동 시절은 어떠셨나요.

 

386세대와 현세대 사이에 낀 세대다. 94년도에 대학에 입학했다. 1994년도는 김영삼 대통령 1, 김일성 주석 서거 등의 시대적 상황이 있던 해였다. 학생운동하면서 연대항쟁도 겪었다. 연대항쟁 이후 한총련 활동이 불법화되고 대의원은 구속 수감되었다. 연대항쟁이 일어난 그 다음해 한총련 출범식에 갔다가 연행되고 구속 수감되어 6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했었다. 학생운동 뿐 아니라 사회운동 전반이 탄압받고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통일 분야에서 2000년 남북정상이 만나고 6.15공동선언이 발표되며 국면이 열렸다.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보려는 시기였다. 이때 386세대와 연대하는 구조도 생겨났다.

대학을 졸업하던 때에는 정당운동에 대한 고민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당시 민주노동당에서 권영길 대통령 후보를 내면서 소수 진보정당 운동이 꽃을 피웠다.

 

학생운동 하던 때와 지금, 시대의 변화는 어떤가요.

 

예전에 운동했던 때와 촛불정국을 보면서 시대가 달라진 게 느껴진다.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나서는 모습잉 특히 그렇다. 변화된 시대에 대중을 어떻게 담아내야 할지 고민이다.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정당운동, 마을활동, 교육공동체 영역으로 활동은 달라졌지만 우리의 운동이 변화된 시대에 맞게 어떻게 변화되어야하는지 고민이다.

 

윗세대와 아랫세대가 소통하는데 혜안이 있나요.

 

없다.(웃음^^) 예전의 경험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지금은 시대와 담론이 변화했고 새로운 주체들이 등장했다. 답은 그 안에서 찾아야 한다. 과거의 경험을 비춰서 답을 찾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활동에서 위기가 있었나요.

 

스타일이 위기에 빠지는 스타일이 아니다. 위기가 잘 풀리지 않아도 크게 상심하지 않는다.장단점이 있다.(웃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생각한다.

마음 속 답답함은 있다. 달라진 시대에 나라는 사람이 나의 가치를 어떻게 풀어내야할지 고민이다. 그래서 도봉구시민협력플랫폼을 하게 되었다. 플랫폼 안에서 같이 고민을 풀고 싶다.

학생운동, 정당운동, 교육공동체 운동, 이 길을 걸어오면서 무엇을 남기면서 오고 있는가라는 고민이 된다.

 

시민단체가 위기라고 하는데 참교육학부모회 상황은 어떤가요. 대안은 있으신가요.

 

참교육학부모회 회원으로 있던 것은 몇 년은 되었지만 실제 활동은 작년 말부터 했다. 참학의 현황이 지금 시민단체의 현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전교조 결성시기와 맞물려 교육문제 해결하기 위한 학부모회 결성했다. 386세대가 중심이 되어 운동단체로 결성이 되었다. 주로 교육정책에 대한 운동이었다. 전전대 지회장님이 회원을 엄청 조직했다고 들었다. 학부모 뿐 만 아니라 공무원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조직했다.

교육적 활동 측면에서 확 달라진 것은 혁신교육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학부모들이 교육활동에 전면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시작부터 교육의 주체들이 잘 참여해서 기반이 잘 잡혀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이전에는 공모사업을 너무 많이 했다. 2년 실무자들이 공모사업에 매몰되어 참학 본연의 목적을 놓쳤다. 이제 바로 잡으려고 한다. 예전에는 회원사업이 주였다면 지금은 대중과 접촉하는 열려진 사업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그런 사업은 단체 강화라는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민관협력사업이 몸 대주기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는데 우리 안에서 이 사업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강화될 것인지 기준이 없었다고 본다. 지금 시민단체들안에서 민관협력사업을 통해 시민단체를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이 부재한 것이 어려움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조직운영과 일꾼들이 튼튼하게 세워진 바탕에서 전략이 잘 세워져야 한다.

민민협혁플랫폼 안에서 구성원들이 이러한 전략을 잘 짜고 고민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사업만 방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누가 대신 계획을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주체들이 직접 구상해야 한다.

 

시민협력플랫폼에 대한 조언을 해주세요.

 

정해진 방향이 없다보니 끊임없이 관점과 방향을 찾는 논의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계속 고민을 나눌 수 있고 각인할 수 있는 자리를 가졌으면 한다. 우려되는 점은 끼리끼리의 네트워크, 그리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네트워크가 관과의 사업을 위탁하는 주체로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플랫폼은 끼리끼리의 사업이 아니고 공적인 사업이 될 수 있도록 사소한 부분도 점검해야 한다.

 

 




아홉 번째 커피 한 잔

121일 금요일 오후3시 너른마루에서 이은경대표님을 만났다.


  

활동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나 동기가 무엇이었나요.

 

도시마을연구소에서 지역문제 해결하는 활동을 했다. 그전에는 도봉시민회에서 리더십 강연을 하는 즐거운 멤버라는 소모임의 멤버였다. 즐거운멤버 그리고 도시마을연구소 활동을 하면서 지역문제는 뭐인지 알아보고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을 찾는 활동으로 지역 활동을 시작했다.

 

즐거운 멤버 전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직장생활을 오래했었다. 회계, 총무 쪽 분야에서.

 

도봉시민회에 가입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직장 생활할 때 수기로 회계하던 시절이었다. 인터넷 도입되면서 컴퓨터로 회계를 할 수 있다길래 궁금했다. 때마침 도봉시민회에서 정보화교육(컴퓨터교육)을 한다는 홍보물을 보데 괴었다. 당신을 가르쳐 드릴 테니 당신도 타인을 가르쳐 줘라라는 홍보물 문구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컴퓨터 교육을 받고 다른 사람을 가르쳤다. 그렇게 정보화 교육 프로그램 운영하다가 즐거운 멤버를 하게 되었다.

 

그 이후의 활동과정은 어떠셨나요.

 

초등학교 다니는 자녀가 있었다. 초등학생 자녀들이 역사 교과서를 외우기만 하는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초...(초등학교 사회 교과서 따라하기) 모임을 결성하고 자녀와 역사지 답사하고 연구 기록을 자료로 남기는 활동을 했다. 당시에 자료를 잘 만들었는지 출판사에서 책으로 내보자고도 했었다. 그 후 2년 동안 제주도에서 휴식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동북시민학교 수강하다가 도시 마을 연구소에서 사무국장으로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아파트를 하나의 마을로 보고 커뮤니티 플래너 활동을 재미있게 했다. 그리고 도봉시민회 대표를 하게 되었다. 대표한지 4년차가 되었다.

도봉시민회에 대한 애착이 컸고 얻은 만큼 해야 된다는 생각에 대표직을 몇 번 고사하다가 대표직을 수락했다. 이전 대표들과는 조금 달라서 회원들이 의아했을 것이다. 대표가 사무국처럼 일을 해서. 내 성격이라 어쩔 수 없다.(웃음^^)

 

시민사회의 변화의 차이를 느끼시나요.

 

시민사회 활동 영역의 변화가 크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투쟁 활동이 주를 이뤘다면 지금은 사회문화를 바꾸는 활동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시장님이 마을지원에 많은 역할을 두다보니 시민사회가 할 역할이 축소되는 단점이 있다. 얼마 전에 도봉시민회에서 시민회의 역할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가 있었다. 중간지원단체에서 하지 못하는 부분을 우리가 담당해보자는 논의였다. 시민단체의 역할이 이전과는 달라졌다고 본다. 시민단체들이 좀 기다려야 한다. 지원이 끊겼을 때 혼란스러워 하는 시민역량을 끌어안을 준비를 해야 한다.

 

사회문화를 바꾸는 활동의 구체적 실행의 모습은 어떤 상인가.

 

50+ 캠퍼스가 생긴다. 도봉시민회의 회원 대부분이 50+ 세대들이다. 그래서 회원들이 여기에 참여해 보자 했다. 길 위의 인문학 같은 프로그램.

자살방지센터 같은 경우 센터가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문화적인 부분 같은 것. 그런 것을 시민단체가 해야 한다.

 

활동하면서 위기는 없었나요.

 

대표하면서 위기였다. 마음공부하면서 성불했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다. 지역에 대해 잘 모르고 사람관계 맺으면서 많이 깨지고 다듬어지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많이 울기도 했고 내가 왜 이 활동을 하는지 생각했다. 특히 돈 문제 관련해서 오해가 생겼을 때 너무 힘들었다.

 

활동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적은 언제인가요.

 

너른마루하면서 활동의 전환적 계기였다. 너른마루하면서 도봉시민회 법인지정도 하고 협동조합도 운영해보고. 오경희 선생님 자체가 보람이다.(웃음^^) 활동을 몰랐던 주부들이 활동에 대해 알게 되고 활동에 젖어들게 되는 게 보람이다.

 

도봉구시민협력플랫폼 대표단체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플랫폼 사업이 나오기 훨씬 전에 도봉 시민단체의 어려움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민단체들이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면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대표하면서 너무 힘들었는데 이런 부분 같이 해결하고 싶은 고민이 있었다. 이런 고민을 플랫폼을 통해 해결해 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다.

하나의 생각인데 단체 대표가 되면 도봉시민단체들이 대표가 된 것을 축하해주는 그런 인사를 하면 좋겠다. 그런 역할을 플랫폼이 했으면 한다.

 

네트워크를 할 때 포인트는 무엇인가.

 

50+에서 시민단체 대표들 연락처 알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개인정보라고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민단체나 대표는 개인정보를 노출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시민단체는 개인 재산이 아니다. 서로 공유하고 공동의 자산이라고 생각을 해야 한다.

 

단체들이 너무 바쁜데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너무 많이 생기고 있다. 이제는 통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행사도 보면 비슷한 종류의 행사가 많은데 비슷한 행사는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5번 갈 행사 1번만 가면 되게 말이다.

 

큰 지향점 같아도 가는 방향이 다른데 어떻게 통합할 수 있을지.

 

도봉시민회 회원이 200명 되면 나눠지자고 했었다. 프로그램들이 분리되어 독립하는 작업이 있었다. 전문적으로 그 분야를 하기 위해 그랬는데 이제는 비슷한 분야는 통합하는 게 좋겠다.

 

컨소시업 단체 대표로서 당부의 말을 해주세요.

 

지치지 않게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즐겁게 했으면 좋겠다. 지치면 깨지기 마련이다. 응원하고 지원해줄 수 있는 부분 함께 하겠다.

 

 

도봉시민협력플랫폼에서 2017년 한해동안 다양한 영역에서 너무나 수고하신 도봉구활동가 선생님들을 위한 파티를 준비하였습니다.^^

편하게 오셔서, 쉼과 힐링을 누리고 가세요!!


이번 파티는 특별한 행사이기 보다는, 


“다른 영역의 활동가 쌤들도 만나고”, 

“맛있는 다과도 함께 먹는 편한 파티”


입니다.

2017년 도봉구에서 활동을 하셨다면, 여러분이 바로 주인공이십니다!!^^

편하게 오시면 됩니다.


◎일시: 2017년 12월 22일(금요일) 오후7시


◎장소: 도봉마을사회적경제센터 1층


◎신청링크: https://goo.gl/forms/jz7k9tOHZJtC1tig1

(정성스런 음식마련을 위한 인원파악이 필요합니다^^)


◎대상: 이 글을 보고계신 2017년에 수고하신 여러분!


◎문의: 시민협력플랫폼 오경희(010-4436-2854)



안녕하세요. 도봉구시민협력플랫폼입니다.

민간단체간의 네트워크초석을 마련하고 활동가들의 역량강화를 위한 첫 시작으로 리더십 진단강의를 마련하였습니다. 리더십 진단을 통해 나를 알고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이해하며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민간단체간의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함께 하시길 기대합니다.

활동가 역량강화 교육에 참가하실 분들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셔서 신청서를 작성해주시면 됩니다. 선착순 15명 모집 마감합니다.


신청서 작성하러 가기>

https://goo.gl/forms/yQ259wxIAJBaFIm33


문의>> 010. 2389.4481 임국희




여덟 번째 커피 한 잔

119일 목요일 오후1시에 평화문화진지에서 김낙준 선배님을 만났다.




활동하게 된 계기와 동기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대학시절 환경에 관심이 많았다. 화학과라 화학물질을 많이 접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배우자가 공무원시험을 준비 한다 해서 같이 준비했는데 나만 붙었다. 면접을 보러 갔더니 남성이 매우 적었다. 면접 본 남성들 대부분이 뽑혔다.

공직생활을 경험상으로 1년만 해보려고 한 것이 3년이 되고 5년이 되었다. 당시 공무원 동기들과 안 좋은 관행들을 없애보자고 결의했다. 공무원은 한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게 되어 있다. 8년간 도봉구에 있다가 노원으로 옮겨갔다. 노원으로 가서 중랑천 사람들이라는 시민단체 함께 만들고 중랑천 관련 일들을 많이 했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직생활을 그만 두었다.

녹색후보들이 지방선거에 출마하려고 하던 계기와 시민후보를 지방선거에 출마시켜보자고 한 것이 맞아서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지금은 어려운 환경이지만 당시 방학3동에 출마해서 시민활동가들과 맨투맨으로 주민들 만나서 당선될 수 있었다. 2006년에 지방선거가 중선거구제로 바뀌면서 소수정당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출마하고 당선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었다. 출마했을 때 주민들이 시민후보들은 한번만 출마하고 그만 할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꼭 재선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의원활동하면서 이 활동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제기하고 비판, 비난하는 직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원활동을 한 것은 아랫세대가 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 것인데 이 일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의원을 그만두고 가장 먼저 한 것은 나무야 카페를 오픈한 것이었다. 그 당시에 열린 주민커뮤니티 공간이 없었다. 나의 책무라는 생각이 들어 빚까지 얻어 오픈했다. 지금은 도서관 속 별난학교라는 지역아동센터에 공간을 주고 그 건물 3층으로 이사했다. 3층에 창업지원센터를 운영 중인데 그 옆으로 나무야 카페 공간이 이동했다.

도봉에서 자라고 도봉에서 많은 역할을 하다 보니 도봉을 넓은 시야로 보게 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졌다. 미선이효순이사건 같은 사회적 이슈에 집중하려고 학습모임하면서 지역사회통합 이슈와 비전을 논의했다. 예전에는 문화영역에 관심이 많았다면 지금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50+세대들과 건강관련 프로그램하려고 한다.

공동모금회의 지역사회 네트워크를 통한 지역사회 복지가 목표인 도시넷 활동도 했다. 지금의 혁신교육 분야인 방과후학교 연결사업, 사례관리(찾동사업으로 제도화), 우리지역사회네트워크, 활동가 스터디 등을 했다. 활동가 스터디는 활동가들이 직접 기획하고 교육 받을 수 있는 방식, 퍼실리테이터 방식으로 시도했다.

박원순 시장 당선 후 서울시에서 마을공동체사업 하게 되었다. 이 때 지역에서 활동하던 핵심인사들이 서울시 중앙으로 많이 진출했다. 이동진 구청장 취임 후 다시 도봉으로 오게 되었다.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마을공동체, 사회적기업 등의 가치사업이 지역에서 잘 수행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지역에서 이러한 가치사업을 만들어보려고 서울시에서 나왔다.

말이 길어졌는데, 그래서 활동하게 된 계기는(웃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살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그렇게 살아왔다.

 

도시넷 활동에서 중점적으로 고려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도봉구 시민사회네트워크의 시작은 정보연이라 생각한다. 처음 만남이 인상 깊었는데 어느 날 푸른청년회라는 간판이 생겨서 가봤다. 사무실에 청년들 몇이 앉아있더라. 그냥 인사하고 나왔다.(웃음^^) 북한동포돕기운동으로 첫 네트워크를 시작했다. 북한동포돕기운동 실무진을 구성해서 도봉시민회 만들었다. 당시에는 사회적 이슈들로 이슈파이팅을 했다. 수락~불암 간 관통도로 건설 반대 투쟁, 효순미선이 투쟁 등을 했고 협의회 수준으로 진행하였다. 관심 있는 사안이면 참여하고 관심 없으면 빠지는 식으로 느슨한 형태로 운영하였다. 2002년 차없는거리를 시작으로 지역이슈를 함께 하게 되었다. 실무기관이었던 도봉시민회는 시민단체로 성격을 바꾸고 단체들이 돌아가면서 협의회의 대표기관과 실무를 담당했다.

네트워크의 시작 관점은 참여단체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놓을 수 있는 질과 양이 다름을 이해해야 한다.

도시넷하면서 시민력이 강화되었다. 최선기 구청장이 취임하면서 당시 임성규 방아골볼지관장을 해임시켰다. 그것을 계기로 방아골복지관에 노조가 생겼다. 도시넷 사업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시민사회에 다양성이 등장하고 많은 부분 제도화된 상황에서 어떻게 시민사회를 모아낼지 조언이나 팁을 알려주세요.

 

보통의 네트워크는 서로 공통된 부분들이 연결되어 있다. 지금 시민협력플랫폼의 구조는 컨소시엄 단체들이 모여서 네트워크를 만드는 구조이다. 실무진도 컨소시엄 단체에서 나온 구조인데 그러면 네트워크가 확장되기 어렵다. 도시넷의 경우 기획 단계부터 확장성을 염두에 두고 네트워크 실무진을 구성했다. 청년영역, 시민사회네트워크 영역, 복지 네트워킹 영역 이렇게 말이다. 실무진들이 자기 단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부문으로 접근해야 네트워크 관계망을 짜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네트워크 하려면 사람들이 만나게 해주어야 한다. 실무진들이 권한을 갖고 결정할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

 

마을공동체 사업의 경우 중앙에서 기획하고 설계할 때와 지역에서 실행할 때 관점의 차이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기획은 머릿속에서 상상해보는 것이다. 지역은 시범지 역할을 한다. 성패사례분석해서 다시 시도하려고 했는데 1차례 시범하고 바로 사업을 오픈했다. 그래서 사업의 문제점도 있다. 준비되지 않은 주민이 모임을 조직하고 활동가로 성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처음 이 사업을 제기했을 때는 시민단체 몇몇을 롤모델로 세워보려고 했었는데 시민사회사업이라는 공격을 받을까봐 하지 못했다. 박원순 시장의 혁신적인 계획의 성과는 지역 곳곳에 시민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변화된 시대 활동가들에게 조언을 해주세요.

 

과거 80년대 대학생 때는 민주화시대 대의를 위해 사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관계 맺을 때 상대방의 관심사나 나와 연결이 어느 정도 맺어있는지 파악해라. 접근방식도 예전과는 달라져야한다. 옛날에는 헌신하면 됐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고민해야 한다. 오히려 느슨한 네트워크 형태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도봉구 시민협력플랫폼에 대한 조언과 당부의 말씀해주세요.

 

모든 사업의 결과와 과정이 모두 성과일 수 없다. 어떤 사업을 결과가 성과적일 수 있고 어떤 사업은 과정이 성과적일 수 있다. 이 모두가 조화롭게 갈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건물을 시공할 때도 1차 준공 후 2, 3, 4차 준공의 과정이 있는데 하나의 결과 모든 사업을 기획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카이빙 기능을 잘 수행했으면 좋겠다. 모든 사업의 과정과 결과가 잘 기록되었으면 한다. 시민협력플랫폼 이후까지 계획하여 사업했으면 한다. 이 사업으로 무엇을 이룰 것인지 명확히 했으면 한다


일곱 번째 커피 한 잔

118일 수요일 오후430분에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 관장실에서 한상진 선배님을 만났다.


 


 

복지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대학 다닐 때 학생운동하면서 송건, 임성규 등과 선후배로 만났었다. 대학 졸업 후 인천에서 활동했다. 1997년에 도봉의 청년회와 여성민우회 등의 몇몇 활동가분들이 복지와 시민운동을 결합한 법인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이 논의부터 참여하게 되었다. 2회 인천에서 왔다갔다하며 논의과정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방아골복지관을 오픈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위탁을 받으려고 알아보았다. 당시 사회복지법인 청십자 두레마을(김진홍 목사)로 복지관을 위탁받고 복지관 운영에 참여했다. 시민과 협력할 수 있는 법인이라고 생각했다. 방아골복지관은 다른 복지관과 시작부터가 다르다. 복지관 위탁 준비부터 계획, 개관까지 다 활동가들이 했다.

 

두레마을과 컨소시엄해서 방아골복지관을 위탁 받은 건가요.

 

두레마을에서 사무국장을 파견하고 시민사회에서도 사무국장을 파견하여 서로 소통하고 협의하는 구조였다.

 

방아골복지관에서 처음에 하신일은 무엇인가요.

처음에는 부장으로 활동했다. 두레마을이 내적으로 법인 지속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두레마을에서 임성규 목사님만 복지관 관장으로 오셔서 활동했다. 2011년부터 내가 관장을 맡았다. 시민사회와 네트워크, 협력하는 구조를 선배들이 꾸준히 만들어가는 와중에 도봉시민사랑방을 꾸리고 거기에 간사로도 활동했다. 지역사회에 뿌리박는 계기였다. 초안산 생태공원 조성 투쟁도 함께 했다.

 

지역에서 계속 활동하셨나요.

 

지역에서 계속 같이 활동했다. 시민사회가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다. 복지관은 그에 비해 재정적으로 안정감과 인력, 그리고 기획력이 있었다. 그래서 시민사회와 함께 네트워크할 수 있는 프로젝트 사업을 받아서 활동했다. 활동가 역량강화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공동모금회에서 지원받아 도시넷 사업을 했다. 복지관에서 도시넷 사업을 집행할 인력 3명 채용해서 팀을 꾸리고 2년간 시민협력에 많은 역할을 했다. 법인으로서의 역할, 즉 행정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이전에는 시민사회 활동가 역량강화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당사자(취약계층) 역량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시민력 강화와 네트워크 역할해왔는데 노하우가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노하우 없다.(웃음^^) 네트워크를 제안하는 단위는 가장 낮은 자리여야 한다. 초반에 결과적으로 실패했던 프로젝트의 대부분은 복지관이 실적 쌓으려고 이 사업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들이다. 서로간의 신뢰가 생기기전 복지관에서 미리 계획을 내오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자고 했던 사업들은 실패했다. 그래서 이후에는 기획 과정부터 협력의 구조로 바꿨다.

도봉구에 처음 생기게 된 복지관이다보니 도봉구 전체를 바라봐야하는 사업이 많았고 어려웠다. 우리의 역량을 뛰어넘는 사업들을 했었다. 한편으로 홍보에서는 큰 성과가 있었지만 활동가들의 성장이나 재미있는 일터의 기능은 수행하지 못했다. 역량이 소진되기만 했다.

관과의 관계에서 갑을관계가 되는 한계가 있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다보니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하면 탄압이 많이 들어왔다.

 

다음 복지관들과 다른 출발을 하게 된 철학은 무엇인가요.

 

나와 가치가 맞아야 참여하고 그래야 성과를 낼 수 가 있다. 가치지향을 맞게 해야 한다. 주민들이 알아야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학습조직도 하고 커리큘럼화 했다. 거기서 역량이 생겨나고 복지관을 탄탄하게 운영해 올 수 있었다.

 

지금도 그 교육과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나요.

 

지금도 운영하고 있다. 복지관에 입사하면 팀을 꾸려서 학습하고 있다. 영화보고 토론도 하고 촛불집회 참가하고 토론하고 한다.

 

법인 위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당시 한나라당 소속 구청장이었을 때, 전국최우수 복지관으로 선정도 되었던 때이다. 구청에서 법인 이사 분 중 한 분의 금고 이상의 범죄기록을 트집 잡아 위탁을 박탈했다. 그 때 임성규 관장님도 복지관을 떠나게 되었다. 집회도 하고 행정소송도 했지만 되돌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관장님을 뺀 나머지 직원들 전원이 고용 승계되었다. 시민대책위가 꾸려져서 함께 싸운 결과였다. 과정을 겪게 되니 더 주민들과 밀착해서 네트워크 하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다.

 

활동하면서 힘들었던 점이나 위기가 있었나요.

 

청소년카페인 휴카페가 있었는데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이 청소년카페가 왜 영업을 하냐며 난리를 피워서 영업을 종료하게 되었다. 청소년 이용률도 높고 영업도 잘되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힘들게 한다.

아랫세대와 가치지향을 맞춰 가는 것이 어렵다. 점점 꼰대가 되어가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고 내 생각을 주입하고 있지는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아랫세대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때 여기를 떠나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 안에서 소통이 잘 되어야하는데 그런 부분이 어렵다.

 

어떨 때 보람을 느끼시나요.

 

우리 일꾼들이 직업적 복지사가 아니라 활동가로 성장되었을 때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주민들과 같은 지향으로 연대하고 협력할 때 보람된다.

 

아랫세대에게 조언과 당부를 해주세요.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는 개인과 가족이다. 기본단위가 유기적으로 결합한 형태가 지역이다. 사업을 할 때 서비스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이 남을 수 있게 했으면 한다. 나의 생각이 옳지만은 않기에 좀 더 내려놓고 주민만남과 사업했으면 한다. 선배 활동가들이 걸어왔던 길을 잘 바라보고 가치지향이 어떠했는지 잘 이해했으면 한다.

 

다른 복지관과 좀 다른데 신입직원들의 반응은 어떠한가요.

 

채용과정에서 세계관이라든지 현실인식을 가진 인력을 채용하려고 한다. 면접에서 그렇게 뽑았는데 실제 삶과 다른 경우가 있다. 그런 점은 좀 어렵다. 신입 직원으로 들어오면 우선 복지관이 걸어온 길, 비전에 대해서 설명하고 일꾼의 비전은 무엇인지 묻고 가치지향을 맞춰가기 위한 토론의 과정들을 만들어 간다. 쉽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벽을 허무는 과정이다. 벽을 허무는 만큼 주민관계가 더 쉽게 되리라 믿는다.

 

도봉구내의 지역사업 위원으로 잘 참여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기관장이라 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업의 개수가 2개로 제한이 된다. 위원으로 참여했을 때 그것이 공격의 실마리로 되는 과정도 있었고 복지관 내에서 하는 작업이 많아 외부 활동을 잘 하지 못한다. 그리고 성향도 앞에 나서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웃음^^)

 

도봉구 시민협력플랫폼에 조업과 당부의 말씀을 해주세요.

 

방아골 네트워크 하면서 고민이 있었는데 그 고민이 또다시 되풀이 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다. 플랫폼은 머무르는 사람은 없다. 단지 타는 사람과 내리는 사람, 마중하고 배웅 나오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 본원적 의미와 방향을 잘 찾았으면 좋겠다. 시민력 강화를 위해 시민, 시민력, 시민협력에 대한 공통의 정리가 명확하게 있었으면 한다. 도봉은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장으로서 가장 좋은 곳인 것 같다. 직접 민주주의의 실험들이 많이 되고 그 경험들이 쌓였으면 좋겠다. 전체보다는 부분, 작은 단위들의 공동체, 커뮤니티를 많이 생산해내는 방식으로 했으면 좋겠다. 욕구가 필요가 되게 하고 그 필요가 실현되게 하는 곳으로 도봉 시민협력플랫폼이 기능했으면 좋겠다.





여섯 번째 커피 한 잔

118일 수요일 오전10시 도봉구의회 2층 의원실에서 이영숙 선배님을 만났다.



 

활동하게 된 동기와 계기는 무엇인가요.

 

 학생운동을 했고, 김근태 의원 선거운동을 함께 하러 96년도에 도봉으로 이사했다. 지역에서 작은 도서관 활동을 했다. 아파트에서 아이들과 독서활동을 했다. 지금의 아이나라 공간이 그때 당시 아파트 모델하우스였다. 폐쇄되고 방치되어 있어서 그 곳에 도서관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 건립 추진위를 만들고 주민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구의원 통해 서명을 전달했다. 구청장 면담하고 도서관이 생겼다. 이런 계기로 참여하면 변화한다는 걸 보고 느꼈다.

도봉시민회 초창기 멤버였다. 아이디가 꿀벌이었다. 도봉시민회 활동하면서 구의원 제안을 받았다. 도서관 건립의 경험이 있어서 구의원을 할 수 있었다. 생활정치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반쪽은 시민 반쪽은 정당 입장으로 선거에 출마했고 재선까지 했다.

 

선거운동이 힘들지 않았나.

 

 모르니까 용감해지더라. 우주가 이 길로 나를 가라고 하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몰라서 재미있게 했다. 선거도 체질이 있나보다.

여성정치인이라 불렸는데 내가 정치인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여성정치인에게 생활정치가 정말 잘 맞는 것 같다. 나의 삶터, 일터가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곳이기 때문에 생활정치가 맞았다.

 

시민활동과 정치 경험 모두 있으신데 활동가들에게 조언해주실 수 있나요.

 

 도봉구의회 구조가 여당, 야당 7:7 구조였다. 주변 시민단체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이었다. 시민단체 자만 나와도 나에게 달려들 정도였다. 2010년 선거 때 의정비에 대한 공격이 컸다. 그래서 구의회가 시민단체와 시민사회에 대한 반감이 컸다. 구의회와 시민사회 사이에서 중간 매개 역할 하는 게 힘들었다. 7대에는 유기훈 의원 등 젊은 의원등리 들어와서 좀 더 분위기가 완화되었다. 시민사회에서 행정사업을 많이 해서 시민사회 고유의 역할에 대한 고민도 있다. 시민사회에 있어봤기 때문에 중간 매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구의회 활동하면서 인상깊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시민사회도 공무원에 대한 편견이 있다. 나 역시 그랬다. 공무원도 시민사회에 대한 편견이 있다. 문제의식만 있고 책임지지 않는다는. 의원이 되니까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의원이 말하니까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봤다. 의원은 개인이 아니라 주민대표임을 느꼈다. 구의원은 보좌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영역을 다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야했다. 도봉구 곳간지킴이 분들과 예산분석도 공부했다.

제일 약한 부분이 장애인, 청년 분야였다. 노적성애라는 장애인 자립기관과 소수정당들과 장애인 권리 찾기 조례 대표 발의하고 이동시설 관련한 캠페인도 했다. 6대 때는 혼자 했는데 7대에는 이 분야의 의원이 들어와서 나눠서 하고 있다.

의원은 주민 자치력을 높여주기 위해 서포트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민원창구처럼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수 도 없다. 시민들이 변하지 않으면 교육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혁신교육, 민주시민교육을 교육 분야에 방점 두었다. 관련 조례제정 및 사업 진행하려고 했다. 공무원들은 사업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제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자기 목소리를 못내는 사람들을 목소리 내게 하는게 우리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민사회 활동을 했던 의원들 중 유일하게 재선을 했는데 그 과정이 어떠셨나요.

 

 여성정치인으로 사는 게 힘들다. 일은 많고, 가정 생활할 시간이 없고, 3D 업종 같다.(웃음^^) 초선 때에는 힘을 갖는 게 어렵고 재선해야 진짜 파워가 생기는 것 같아서 당연히 재선을 결심했다. 지금 구조는 강 단체장, 약 기초의회 구조다. 기초의회가 힘을 가지려면 주민과 더 친해져야 한다. 그런 일을 하고 싶다. 하남시는 저녁 7시에 의회를 열기도 한다. 직장인도 의회 방청을 할 수 있게 말이다. 주민참여가 되어야 의회가 힘을 가질 수 있고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가야한다.

예전에는 정치진입이 어려웠는데 구의회가 잘 역사가 이뤄지면서 단계별로 올라가는 게 수월해졌다. 국회의원들도 지방분권에 대해 너무 모르기 때문에 기초의원들이 국회로 진출하는 게 좋겠다. 여성정치인 영역이 블루오션이기 때문에 그런 비전을 가지고 임하고 있다.

 

구의회가 7:7 구조면 의장은 어디에서 하나요.

 

상반기는 여당, 하반기는 야당 이렇게 하기로 했다. 잘 지켜졌다.


방청은 어떻게 하나요.

 

 방청은 아무나 할 수 있다. 예전에 민우회 안에 의회 방청모임도 있었다. 의회 홈페이지에 신청해서 오면 되고 당일에도 신청가능하다.

의회 의장은 연령이 많거나 당선 경험이 많으신 분이 우대되기 때문에 의장 진출하기가 어렵다. 의장이 어떤 마인드로 의회를 운영하는지에 따라 방향이 달라지는데 열린 의회를 만드는데서 이런 점이 아쉽다.

 

정치신인에게 있어 가장 먼저 뛰어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정당과 부딪히는 것이다. 무소속으로 출마하면 당선되기가 어렵다. 여성 의무 공천제가 도입되어 기회가 왔던 것이다. 김근태 의장과 친하고 존경해서 민주당에 입당했다. 선거 출마할 때 민주노동당 여성후보가 있었는데 갈등구조가 전혀 없었다. 함께 의회활동을 못해서 아쉬웠다. 민주당 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다 같은 것으로 싸잡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양한 분야의 기초의원, 소수정당도 진출할 수 있게 선거법이 개혁되어야 한다. 그래야 지방분권이 강화될 수 있다. 지금의 양당구조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당장 정당공천을 폐지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제대로 된 사람을 공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발한 연구회하고 기초의회 발전 방향을 연구하는 기초의원들 모임이 있다. 2010년부터 지방자치발전소라고 사회적기업도 만들었다. 재선하면 노하우가 많이 생긴다. 경험과 자료도 많이 쌓이고. 그런데 낙선하게 되면 이러한 경험과 자료들이 사장 된다. 그래서 초선 의원에 대한 연수나 교육을 의원직을 지내면서 많은 노하우가 쌓인 분들이 직접 하는 것을 만들고 싶다. 다음에도 당선되면 이 사업을 꼭 해보고 싶다. 간사도 두고 정착할 수 있게.

 

시민사회와 최종 목적이 비슷한데 시민단체에 바라는 점은 무엇인가요.

 

 지금 도봉구내에 진정한 시민단체가 있나하는 의문이 있다. 박원순 시장 하에서 시민단체가 많이 제도화되었다. 시민사회 역할과 저변이 더 발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그렇게 된 것이지 단체가 부족하고 어려워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건 시민단체를 공격하려고 하는 얘기이다. 우리 안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바를 더 빠르게 잘 이룰 수 있는 구조이다. 시민단체가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야할 때는 균형감을 가지고 내야한다.

 

도봉 시민협력플랫폼에 대한 조언을 해주세요.


 굉장한 변화를 느낀다. 지역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지치고 소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업에 실패하더라도 사람관계만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NPO동북권 지원센터가 만들어지면 민민간에서 역할할텐데 시너지 효과가 날 것 같다. 공무원, 행정과 반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활동가들이 많이 지치는데 성찰의 시간과 활동가들 간의 네트워크도 잘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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