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구 민간단체 소개 인터뷰 #10

 

도봉구립 쌍문동청소년문화의집 (김월수 관장)


 


지역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나 동기가 있다면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처음부터 청소년과 함께 무엇을 해보겠다는 커다란 포부를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며 논문을 쓰고 방과 후 교실을 통해 저소득층의 아이들을 만났다. 2002년 송파종합사회복지관에서 3년 반을 일했다. 2005년 창동청소년수련관이 개관하고 2013년 초까지 근무한 후 같은 해 4월 도봉교육복지센터가 개관하면서 사)청소년교육전략 21(이하 법인)이 서울북부교육지원청으로부터 수탁운영하게 되어 센터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2016년부터는 같은 법인 산하기관중 하나인 쌍문동청소년문화의집(이하 쌍청문)의 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기관이 만들어진 취지와 목적 그리고 활동내용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2002년 설립된 사단법인 청소년교육전략21은 청소년을 위한 전문 프로그램 개발 및 보급청소년 관련 기초조사 및 정책연구청소년 전문가 양성을 위한 연수 등을 통해 행복한 청소년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 단체로 청소년도 시민이다라는 관점아래 청소년이 우리 사회의 주인공으로 성장 할 수 있도록 청소년 인성·인권·참여사업을 하고 있다.

산하기관으로 2018년 현재 도봉구에 쌍문동청소년문화의집도봉구청소년상담복지센터도봉교육복지센터의 3개 기rhks이동작구에는 동작청소년문화의집사당청소년문화의집동작진로직업체험지원센터 3개 기관으로 총6개 청소년시설을 수탁운영하고 있다.

그중 쌍문동청소년문화의집은 2011년부터 우리법인이 수탁운영하게 되면서 지역사회에 크게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21세기 창의적 시민청소년 양성”, “도봉구 청소년 행복거점” 이라는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지역사회 청소년의 소통 중심 공간으로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정보문화예술을 지원하는 열린 청소년 전용공간이다.

청소년이 주인공으로서 주체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우리의 큰 그림에 청소년들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 스스로가 열정을 가질 수 있도록 지지하고 있다.

타 기관과는 차별화를 두었다. 청소년 지도자가 앞장서서 청소년들의 욕구를 앞지르지 않고 먼저 청소년들이 본인들의 욕구를 깊이 파악하고 소통하며 스스로 리더가 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지속적인 회의를 통해 청소년들의 욕구를 파악하고 있으며, 큰 틀 안에서 청소년들의 욕구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주로 하고 있는 활동은 먼저 청소년과 주민이 모이는 공간으로 청소년운영위원회, 청소년자원봉사단 등이 있으며, 미래를 창조해가는 꿈꾸는 공간으로 청소년자치활동, 동아리활동, 문화체험활동, 지역사회참여활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지역사회 자원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유관기관 협력사업, 학교 연계사업, 지역사회 자원 양성이라는 큰 틀에서 운영되고 있다.

 

활동 중에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청소년과 우리 기관의 청소년지도사들이 워낙 즐겁고 행복하게 활동하고 있어서 활동 중에 너무 힘들다는 점은 딱히 없다. 타 자치구나 지방의 어느 청소년문화의집과 비교해 보셔도 새로 설립된 기관도 아니면서 3회 연속(2년 주기 평가) 전국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되고, 올해에는 청소년운영위원회 쌍심지 쌍문동의 심장 지역청소년가 전국 최우수 기관으로 여성가족부장관상까지 수상하였다. 다만, 활동 중 가장 힘들었던 점이라기보다는 기관을 운영하면서 힘든 부분은 인력 부족, 청소년활동을 위한 예산부족, 시설과 기자재의 노후화 부분이다. 모든 기관들이 다 겪고 있는 부분이긴 하겠으나 사실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의미 있었던 점은, 그러함에도 청소년과 직원들이 행복하게 청소년활동을 지금까지 열심히 해왔고, 그러한 성과가 상으로 이어지고 지역에서 인정받고, 언론에서도 호평 보도되고 있어 서울지역의 타 기관은 물론, 지방에서 청소년문화의집을 개소하고자 하는 곳에서 공무원들과 함께 벤치마킹하러 끊임없이 찾아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청소년들이 인정하고 행복해하며 적극적으로 우리 쌍청문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3회 연속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된 비결은 무엇인가요?


 

 청소년과 담당직원의 호흡이 잘 맞는다. 직원들의 역량이 각자 있다. 청소년들과 가까이에서 소통을 하며 소통구조를 만든다. 청소년들이 원하는 바를 잘 읽는다. 이러한 부분은 기자재가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운영을 하면서 직원들의 의견을 반영한다. 역량의 양과 질의 차이를 활용한다. 청소년과 직원의 시너지를 활용한다. 큰 틀이나 규정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제안에 ‘OK’ 한다. 살림규모에 맞게 운영한고 있다.

 

학생들이 책임감과 함께 본인의 느낌에 따라 자율성을 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동아리결성은 공고를 통해 이루어지며 동아리활동가는 인터뷰를 통해 선발된다. 동아리활동가 인터뷰는 사고방지와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동아리활동에는 소정의 활동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공간과 간식 등을 제공하고 있다. 활동과 관련된 주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동아리연합캠프와 연계해 활동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댄스동아리의 경우 지역행사에 참여하는 기회를 갖기도 한다. 외부초대가수 대신 지역의 인재를 활용하는 차원에서 지역행사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재능을 뽐낼 수 있는 무대를 제공받기도 한다.


 

활동 중에 가장 의미 있었던 점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보통 기관에 10명 정도의 직원이 있다. 쌍청문은 나를 포함 6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타 기관에서 벤치마킹을 하러 온다. 성과도 중요하고, 예산과 인력도 중요하나 가장 우선순위는 아니다. 청소년이 행복하고 즐거운가가 가장 중요하다. 직원들이 청소년들에게 우선순위를 두고 자발성을 갖고 움직일 때 청소년들도 자발성을 갖고 움직이더라. 서로 행복하고 즐겁게 일할 때 성과는 덤으로 따라온다. 청소년과 담당자의 관계가 중요하다. 행정이나 행사를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과 함께 행복한 일을 고민하고 만들어 나갈 때 이러한 것도 부수적으로 행복한 고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청소년과 직원, 직원과 청소년 서로의 긍정적 에너지 교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활동방향이나 비전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예전에는 선생님이 청소년을 이끌었지만 나이를 불문하고 함께 걸어가야 한다. 예전에는 학교가 앞서갔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세계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도봉을 벗어날 수 없다. 청소년들이 우리지역을 넘어 더 큰 무대로 나아가 뜻을 펼칠 수 있게 동반자로서 함께 하고자 한다.

 

도봉구시민협력플랫폼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필요에 의해 플랫폼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누가 끌어서, 밀어서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마중물의역할을 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누구든 부담 없이 와서 물을 마시고 가는 플랫폼이 되길 기대한다. 지역의 다양한 영역에서 서로 자석처럼 이끌려 모이게 되고 소통하며 협력하게 될 때 진정한 플랫폼이라고 생각한다. 장기간 긴 호흡으로 갈 수 있길 바란다.

 

도봉구 민간단체 소개 인터뷰 #9

 

행복중심서울동북생협(안경수)



활동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늘 사람보다는 자연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환경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둘째 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며 환경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전공하지 않은 분야에서 일한다는 부담감은 부족함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하지만 하나를 알면 하나를 알리고, 두 개를 공부하면 두 개를 알리고 함께 실천하도록 가치를 확산하는 것이 운동이라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현실을 피하지 않았다.

환경 분야는 매우 다양하다. 전공과 관계없이 환경은 생명이고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자연 속에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했다. 에너지, , 자연 생태, 쓰레기 등등 환경 문제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그중에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농업, 하루 세 번 차리는 밥상에 특히 관심이 갔다환경, 경제, 건강, 지역, 교육, 소비, 여성, 문화, 경제 등의 문제가 함께 차려진 밥상을 보며 행복중심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에 환경 교육도 그랬지만 식생활 교육도 활성화되지 못했었다행복중심 생협(당시에는 민우회 생협)에서 식생활 교육 강사 양성과정이 있었다혼자 책으로만 공부하던 나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수강이 행복중심생협에서 본격적인 활동의 시작이 되었다. 여러 일을 한 번에 못하는 성격이다. 하지만 환경교육과 행복중심의 식생활 교육팀 활동도 함께 하게 되었다. 열심히 못해 더 하라는 뜻이었는지 이사직을 제안 받았다.

당시 행복중심 이사장님께서 내가 하고 있는 환경운동을 지역에서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마음이 열려있는 행복중심의 조합원들과 함께하면 효과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전 어려운 상황 속에서 조직을 이끌어 온 선배 활동가들 덕분에 지금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고마웠고, 나도 그 역할을 조금이나마 해야만 조직이 지속성을 갖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사직을 수락하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인 만큼 탈핵위원회를 곧바로 만들어 활동을 하게 되었다.

 

환경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 이유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어렸을 적에 시골에서 자랐다. 동네 개울에 민물새우가 살 정도로 환경이 깨끗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고 소중한 줄 몰랐다. 그런데 결혼하고 서울에서 살다보니 그 당연한 것이 귀하고 감사한 것이었다. 너무 아쉬웠다. 특히 골프장이 계속 만들어지고 여러 가지 환경문제들이 터질 때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부분 어린 시절을 서울과 같은 도시에서 보내며 자연이 주는 특별한 것들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는 것도 아쉬운데 거기에 파괴되고 있는 현실이 우울했다 . 지켜내지 않으면 모든 걸 다 잃을 수 있다. 아이들에게 온전한 자연을 줄 수 있도록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환경에 관한 공부를 하다 보니 귀결은 농업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농업이 중요한 이유는 뭔가요.


 농업은 안정적인 식량을 보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농업과 농촌의 존립이 곧 국민의 삶과 연결된다. 농업은 국가를 지탱하는 힘이다. 우리나라 식량자급력이 약 23% 정도다. 우리가 대하는 밥상의 80%가 수입 농산물이라고 보면 된다. 기후변화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농산물 생산량은 줄고 가격은 오르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추측할 수 있다. 밥상에는 정치와 경제, 환경 등 모든 것이 담겨있다. 농업을 포기한 나라의 비극은 아이티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농업을 살리지 않으면 종국에는 식량 주권을 지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식량주권은 우리가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권리. 율무나 이런 잡곡들 지금 우리가 소비하지 않으면 농사를 짓지 않게 되고 종국에는 없어지고 만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맛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의무적으로라도 소비해야 된다. 생협에서 협동소비하면 농업과 환경이 살아나며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친환경적인 농업은 특히 지속 가능한 농촌을, 국가를 만들어가는 힘이다.


활동하면서 힘들고 어려웠던 것과 의미있고 보람되었던 것을 말씀해주세요.

 

 교육을 통해서든 편한 수다를 통해서든 내 이야기를 듣고 삶과 생활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몸에 무한한 에너지가 채워지는 듯하다. 보람차다. 운동의 성과는 변화이다. 내 덕분에 변화되었다. 고맙다는 말만큼 좋은 말이 있을까 싶다.

현재가 어렵다. 사람을 키워내는 일도 어렵다. 자본력이 없어서 어렵게 키워낸 사람을 놓칠 때는 정말 힘들다. 행복중심의 조합원들이 생협을 이용할 때 조직의 지속력과 내용이 커진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앞으로의 활동의 방향성과 비전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행복중심은 여성이 주체가 되는 생협이다. 동북의 활동가는 전부 여성이다.

여성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고 싶다. 여성민우회생협으로 출발했던 행복중심생협은 지속 가능한 생산을 위한 밥상을 차리고 부엌에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여성이 주체가 되어 친환경 협동 소비로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한다.

그동안 여성, 환경, 지역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앞으로도 행복중심생협 조합원은 참 먹거리를 나누고, 생산자의 지속가능한 생산을 보장하며 생태계를 보호하고, 우리 사회를 조금 더 인간화된 사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 갈 것이다. 이렇듯 생협은 좋은 먹거리만 얻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참 먹거리와 생활재는 물론이고 생활 속 문제를 해결하고 더 많은 민주주의가 가능한 지역 공동체를 만드는 곳이다. 마을공동체로서 관계가 살아 숨 쉬는 지역사회를 만드는데 행복중심이 함께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플랫폼에 거는 기대와 당부의 말씀을 해주세요.

 

 시민협력플랫폼이 한 두해 사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갔으면 좋겠다. 1,2년 앞만 보지 말고 멀리 보되, 걸음은 크게 걸었으면 한다.

도봉구 민간단체 소개 인터뷰 #8

 

꿈꾸는 터(백현모)

 


꿈꾸는 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대학교 3학년때 기독학과에서 인문학으로 보는 성경모임을 했다. 기독교에 대한 편견 때문에 좋은 신앙인들이 평가절하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2007년에 개독교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냈다. 우리 책을 인쇄할 출판사가 없어서 출판사를 내게 된 것이다. 3명에서 시작을 했다. 출판에 필요한 영업, 디자인, 편집·수정 등을 위해 많은 공부를 했다. 생각보다 책이 크게 이슈가 되어서 각종 일간지에도 실리고 여러 인터뷰도 하게 되었다. 2, 3년 하다 그만 둘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더 생겨서 출판 콘텐츠를 더 고민하고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현재 10년차에 접어들었고 4-5년 전부터 사회적 기업 붐이 일어나면서 사회적기업, 적정기술분야 책을 냈었고 관련 기관, 센터와 협약하여 책을 출판했다.

하지만 사회적 기업이 죽으면서 책이 팔리지 않았다. 사회적경제 분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가 떨어졌다.

사회적 기업이 과연 가능할까?” 스스로도 사회적기업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돈 벌기가 힘들었다. 2014년 한 달에 사오십만원의 수익은 꾸준히 유지했다.

디자인, 광고, 마케팅 등 간간히 일을 받아 했다.

그 후 고용노동부로부터 프로젝트를 맡아 일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았지만 일이 힘들었다.

용산에 자리를 잡고 두란노 아버지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월간지 아버지를 함께 작업하자는 제안을 했다. 4년째 함께 작업하고 있다. 현재는 1년에 두 권이상의 책을 발행하지 않고 있다. 콘텐츠에 대한 욕심이 많다. 영상콘텐츠 쪽에도 사람을 영입해 함께 콘텐츠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돈은 없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며 버티고 있다. 디자인이나 광고 일을 하며 10년 동안 버티고 있다.


■ 꿈꾸는 터가 지향하는 바와 집중사업은 무엇인가요. 


우선 꿈꾸는터 구성원들이 꿈을 키우고 그 꿈이 자리 잡았으면 한다. 그런 마음으로 책을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꿈을 키우고 그 꿈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려고 한다.

요즘은 재밌고 유쾌한 콘텐츠를 만들고 싶고 만들고 있다. 출판을 비롯한 각종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책 한권을 만드는데 천만원정도 든다. 그리고 3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 된다. 열심히 만들었는데 판매가 저조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때가 위기이고 힘이 든다.

세 번의 연속된 실패가 있었다. 빚에 대한 부담감과 답답함이 있었다. 2년 동안 그렇게 힘들었던 것 같다.

의미 있는 책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을 때 힘들었다. 첫 책이 너무 인기 있어서 교만했던 것 같다. 인정받지 못함에 섭섭했고 실력이 안 됨에 속상했다. 교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내공이 쌓였다.

 

보람이 느껴질 때는 언제인가요.

 

소외된 99%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책이 성공했을 때 좋았다. 구성원들과 아이디어를 내고 의견을 조율하고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다.

순간순간 힘도 들었지만 놀다가 일하고 이번에 이런 거 배웠다하며 극복하는 힘도 생긴다. 함께 일하는 친구들과 연대감과 유대감을 가질 때 보람차다.

 

소개하고 싶은 콘텐츠가 있나요.

 

드라마 속 윤리라는 책이다. 드라마 장면에서 윤리적 이슈를 뽑아내서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할 수 있을지 의문을 던지는 책이다. 꿈꾸는 터가 던지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하다.

도봉에 와서 영상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흘러라 방학천이라는 영상(유튜브에서 시청 가능)인데 도봉지역의 콘텐츠를 영상으로 담는 작업이 재미있다. 유튜브에 꿈꾸는 터’ ‘승현이네 이유식’ ‘꿈꾸는 뮤직등의 채널을 운영하고 다양한 콘텐츠들을 제작하고 있다.


■ 앞으로 활동 방향성과 비전은 무엇인가요.


용산에 있을 때는 청년활동에 비중점을 뒀다. 도봉으로 와서는 콘텐츠 제작에 중점을 두고 있다. 도봉구의 콘텐츠를 더 만들어보고 싶다. 방학천과 함께 거리문화, 방학천 문화예술 거리만의 문화를 만들고 정착하고 싶다. 청년축제 기획, 디자인 등의 지역 활동 관련한 업무도 하고 있다. 함께 디자인하고 기획하고 문화를 확장하고 연대하며 재미있게 하고 싶다.

 

■ 시민협력플랫폼에 거는 기대와 당부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컨퍼런스가 딱 맞는 형태라고 생각한다. 예전처럼 하나의 이슈로 투쟁하는 것은 지금은 맞지 않는 것 같다. 컨퍼런스에 거는 기대가 크다. 인터뷰를 통한 연계를 갖는 것도 좋다. 공론장의 역할을 했으면 좋겠고 네트워크가 더 확대되고 활발해졌으면 한다.

도봉구 민간단체 소개 인터뷰 #7

 

그린트리예술창작센터(이진희)

 

 


그린트리예술창작센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만들었던 계기는 별 뜻 없이(?)^^ 그저 연습 삼아 공연을 해볼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쌍문동에서 태어나 자라고 결혼하고 아이도 키우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성악가를 꿈꿨지만 좋은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고 문화적 혜택도 많이 받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지도를 받지 못하고 취미로만 성악을 했다. 집에서 반대가 심해서 투쟁(?)도 했다.^^ 예술 쪽이 인맥, 지연, 학연을 중요시 여기는 분야다보니 좋은 선생님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누군가 성악을 공부하려면 이탈리아에 가야한다는 말을 듣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한 달 준비해서 바로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다. 거기서 10년을 공부했다. 당시, 한국에서 오는 유학생들은 다들 대학, 대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그 중 정말 잘 하는 사람들이 이탈리아로 유학을 왔는데,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고 바로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소질이 없다고 포기하고 돌아가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해야만 했다.

5년제 석사과정인 국립음악원을 가까스로 꼴찌로 입학하게 되었다. 하루에 4시간만 자면서 언어공부, 성악공부를 했다. 입학보다 졸업이 더 힘든 과정이었다. 수없는 좌절과 나와의 싸움에서 결국 꼴찌로 입학했지만 수석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졸업시험에서 지도교수님은 많이 부족한 무대였지만 너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어.’라고 하셨고 나에겐 최고의 찬사였다. 무대만 서면 무서웠고 오롯이 혼자 모든 평가를 감당해내야 하는 공포를 없애기 위해 이탈리아 전국을 다니며 100이상 순회공연을 했다. 노래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뭐든 배웠고 익혔다. 연극, , 프랑스어, 독일어 등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열심히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오자 여전히 지연과 학연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많은 좌절과 막막함을 느꼈다. 인간관계에서 안 좋은 경험도 많이 하고 상처도 받았다.

가곡 음반을 내고 있었을 때 공연을 함께 하던 선생님과 함께 일본여행을 가게 되었고 가기서 뮤지컬 극단 사계대표를 만나게 되었다. 만난 자리에서 바로 오디션을 보게 되었는데 오페라의 유령의 주연으로 모든 경비를 다 지원해주겠다며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으나 어떤 곳인지도 몰랐고 음반을 내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거절했다.

극단 대표님이 음반제작을 끝내고 다시 일본에 올 수 있도록 초청해 줘서 당시 50년의 전통을 가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뮤지컬 극단인 거대한 사계뮤지컬 극단을 전국적으로 2주일간 투어를 해 주며 소개해 주시고는 입단하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성악만 했던 나에게 큰 도전이었지만 너무나도 스케일이 크고 완벽했던 공연들을 보며 단 시간 안에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을 거라는 마음에 설레었다.

주역으로 스카웃 받았지만 사계에 입단하자마자 청소부터 시켰다. 의아했지만 즐겁게 했다. 부족했으니까. 성악은 많은 무대를 섰고 배웠고 익혔지만 뮤지컬은 처음이었으니까. 연수생 과정 거치고 무대에 서는 과정은 실로 어마어마하게 어렵고 엄격했다. 4년 동안 470회의 공연을 하면서 무대를 대하는 자세와 무대의 신성함을 알게 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값진 경험이었다. 하루하루가 긴장과 노력만이 있었다. 어느 날 2회 공연이 끝나 너무도 피곤한 상태였는데도 로비에 남아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오페라에 대한 열망이 뮤지컬보다 훨씬 크다는 걸 확인하고 극단을 그만 두고 나왔다.

4년간 일만 하느라 지쳤고 놀고 싶었다. 벌어둔 돈을 모두 털어서 바로 캐나다 벤쿠버의 베트남 가정에 홈스테이 일년치를 송금하고 영어 언어연수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다시 유학생으로 일본인, 이탈리아인, 맥시코인, 한국인과 사귀며 원 없이 여행하고 놀며 영어를 배웠다. 일 년 후 한국으로 돌아와 오페라 오디션을 봤고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불가리아 원형극장에서 오페라 사랑의 묘약주연으로 발탁되어 공연을 했고 2007년도 완전히 한국으로 귀국했다. 2008년도에 20년 교제 끝에 남편과 결혼했다.

한국에서 남편이 당시 미술치료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나보고 음악을 하니 음악치료를 공부해보면 어떻겠냐고 했고 음악치료를 공부했다. 첫아이의 태교를 음악치료로 한 것 같다. 매번 나는 부족하다.’ 라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도전했고 공부했고 노력하다보니 어느새 많은 것을 할 줄 알게 되었다.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열과 성을 다했다.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열과 성의가 전해졌는지 학생들에게 엄청 인기가 많아 강의 우수 총장상까지 받게 되었다. 많은 아픔과 절망을 경험한 만큼 상대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 열린 마음으로 대하다보니 인기가 많아졌던 것 같다. 내가 노래를 못했기 때문에 노래 못하는 학생이 이해가 되었고 그에 맞는 조언도 해 줄 수 있었다.

어린나이에 오랫동안 혼자 유학생활을 하며 상처받고 견디고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고.. 참 많은 경험들 속에서 나도 많이 성장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우리 마을에서는 나처럼 선생님을 못 찾아서 헤매지 않고, 문화적인 혜택을 어렸을 때부터 누릴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2015, 그린트리예술창작센터를 개관한 이 후 지금까지 거의 매주 공연을 했고 안팎으로 160회 이상 공연을 했다.

가정을 돌보는 것과 육아도 제대로 하기 어려웠지만 남편의 격려와 도움으로 지속할 수 있었다. 매주 공연을 준비하는 것이 정말 많이 힘들지만 점점 사람들이 변화해 가기도 하고 감동받는 것을 보면서 힘이 되었고 중단할 수가 없었다.

검찰청의 범죄피해자센터와 연계해서 범죄피해자, 유가족들에게 공연을 보여주었는데 예술치료로도 열지 못했던 닫힌 마음이 공연으로 치유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한 회 한 회 정성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운영하면서 한 번도 공연에 대한 지원을 받은 적은 없다.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을 한 이후 감동후불제로 받기도 하고 회원들의 연간회비를 받기도 한다. 지금은 아티스트를 위해 적지만 입장료를 받고 있다.

 

지속하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하나요.

지속하기 위해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는 않는다. 내가 정말 원하지 않으면 난 언제라도 그만 둘 것이다. 비영리민간단체이기에 열정이 있는 누군가에게 승계를 하게 되겠지만 정말 좋아하고 원해서 하지 않으면 감당하기 힘든 일이기에 늘 자신에게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정말 이 일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을 하고 있다.

 

앞으로의 비전은 무엇인가요.

 

비전은 없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래서 내가 성장하고 마을도 성장하고 마을의 누군가가 함께 성장해 갔으면 좋겠다. 160회 공연을 했는데 한 번도 똑같은 공연을 한 적이 없다. 예술인의 네트워크와 창작 활동이 확장되었다. 늘 흥분되고 설레는 작업들로 많은 아티스트들과 다양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싶다.

 

의미 있는 경험이 있었나요.

 

마을에 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늘 타지에서만 살았는데 마을에서 우리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마을이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좋은 동네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마을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다양한 마을활동과 혁신교육프로그램도 진행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거의 10년간 대학생들만 가르쳐 왔는데, 마을엔선 초등학생, .고생, 청년, 성인, 어르신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하고 교육했다. 마을에서 다르지만 좋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로 이해하고 바라보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한 마을에서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 든든하고 좋은 경험이다.

 

힘들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그린트리예술창작센터에서 하는 공연들은 매주 참 공을 많이 들인 공연들이다. 좋은 분을 섭외하고 기획하고 공연을 만들고... 하지만 그 중에 홍보가 제일 어렵고 힘들다. 어렵게 출연자를 모셔서 정성을 들여 공연을 준비했는데 관객이 두 세명만 앉아 있으면 정말 출연자에게 미안하고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적은 인원으로 많은 일들을 하다 보니 행정적인 진행이나 홍보 등 늘 부족했던 것 같다.

 

플랫폼에 바라는 바나 당부의 말씀을 해주세요.

 

아직도 도봉구가 살기 좋은 마을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정말 좋은 행사나 기획 프로그램들이 많고 정보들도 쏟아지고 있지만 활동가나 늘상 관심을 갖는 사람들만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도봉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플랫폼에 접속해서 정보를 알 수 있고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파이를 넓혀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린트리예술창작센터도 협력 플랫폼의 하나로서 그 역할을 지속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도봉구 민간단체 소개 인터뷰 #6


도봉 청년 인정

(김태환, 홍주현)

 


 

■ 청년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나 동기가 무엇인가요.

 


김태환(도봉 청년인정 대표)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에서 실습생으로 활동하면서 홍주현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그 후 자연스럽게 청년활동에 합류하게 되었다.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이하 방아골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사회활동 동아리 청사진’(청소년이 사회문제를 진단하다)의 초창기 멤버로 활동하였고 현재 퍼실리테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방아골복지관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문화기획팀 루다’, 사회문제해결을 위한 청사진’, 드론동아리가 운영 중에 있다.

 

홍주현(사회복지사)

도봉 청년 인정은 지역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75월에 만들어졌다.

2016년 말 공포된 서울특별시 도봉구 청년기본 조례를 보며 이는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법안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청년정책제안을 청년인 당사자들이 고민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심이 섰다. ‘청년 인정의 네이밍은 청년고용촉진 특별법을 보면 청년은 취업을 원하는 사람으로 나와 있어 사회 안에서 종합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존재라는 발상에서 짓게 되었다. 노동시장의 상품처럼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정책을 제안하고 법안을 마련하고 싶었다.

 

■ 단체가 만들어진 취지와 목적 그리고 활동내용을 알고 싶어요.

 

20179월에 개최된 청년정책 간담회에 도봉청년인정(이하 도봉청년)에서 활동하고 있는 위원들과 도봉구 청년정책네트워크모니터링분과와 도봉구의회 의원이 만나 청년의 현실과 욕구를 반영한 정책들을 토론하고 제안했다. 그러나 정책제안에 근거가 필요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청년이 조직되어 정책을 연구하고 근거를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서울동북여성민우회나 시민단체에서 의정모니터링을 활발히 하는 것처럼 청년도 지역모니터링과 의정모니터링을 통해 청년을 위한 정책의 변화를 주도할 필요성을 느낀다.

 

도봉청년이 조직되었을 당시 7명에서 시작해서 현재는 20명에 이른다.

자발적 모임이고 나이, 성별, 직업도 제각각인 다양한 층이 모여 있다.

현재는 자발적인 모임에서 직업으로 하고 싶다는 욕구도 생겨 정관을 만들고 단체등록을 준비 중에 있다.

플랫폼처럼 운영하고 싶다. 행정의 언어가 어렵다. 행정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변호사와 같은 역할)

정책제안과 청년정책모니터링 등을 하면서 소통하고 정치를 변화시키고 싶다.

청년의 문제는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민영역에서 차세대에 대한 걱정과 문제해결을 위한 고민을 함께 해야 할 것 같다.

 

소통의 방법으로 마을 미디어를 만들면 좋겠다. 우리끼리 재미있게 소통하면서 시사를 하는 것이다. 너른 마루를 방송국으로 만들고, 매거진을 청년과 주민들의 모임으로 함께 만들어보면 좋을 것 같다.

 

■ 활동하면서 힘들었던 점과 가장 의미 있던 점은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김태환

돈 없음이 가장 힘들다. 청년, 학생, 아들로서의 역할 속에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다. 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하고 싶은데 자금이 없다. 활동을 직업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활동이 재미있다. 청년을 만나 인생이야기를 듣고 형태를 담아낼 수 있는 정책이나 사업으로 청년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홍주현

동작구에서 활동할 당시 행정의 언어들이 어려웠다. 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다른 자치구 만남에서도 주제, 예산, 행정 등 모두 이해하기 어려웠다. 회의, 포럼을 많이 다녀보자 라고 생각하고 모르지만 열심히 했다. 결국 열심히 하는 사람을 찾아주더라.

 

연대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던 때가 있었는데 관점도 다르고 연대하기가 어려웠다. 자금이 없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다. 소셜임팩트비즈니스의 시대가 오고 있다. 사회활동이 돈으로 환산되고 가치가 매겨진다. 단발적 프로젝트를 여러 번 한다. 서비스품질은 다르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모금을 한다. 멤버십의 시대는 지나갔다. 사회적 의미의 상품으로 사업을 풀어갈 수 있다. (: 강의, 컨설팅 등)

 

청년을 조직화 했을 때 가장 의미가 있었다. 모으기 어렵다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청년조직은 풀뿌리민주주의 한 형태로 사회를 바꾸는데 기여할 것이라 생각한다. 40플러스, 50플러스처럼.

 

■ 앞으로의 활동방향성과 비전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청년단체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싶다. 행정과 청년의 중간 매개역할로 청년인정이 자리 잡고 싶다.

 

■  도봉구시민협력플랫폼에 기대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도봉구시민협력플랫폼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유입되고 협치와 민간역량이 강화되기를 바란다. 플랫폼을 통해 지역청소년을 만나고 또 평범한 주민들이 사업취지에 맞게 새로운 경험을 해보면 좋겠다.

도봉지역에도 광진시민사회처럼 공유건물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지역의제나 불평등을 해소하는 통로가 되면 좋겠다.

 

 

 

 

 

도봉구 민간단체 소개 인터뷰 #5


도봉민생상담소


■ 지역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나 동기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세요.

 

대학에서 보건학을 전공하고 외국계 의료기기회사에서 3년 반을 근무했다. 그 후 외국어학원에서 2년을 근무했다. 나의 직장생활은 총 5년 반이다.

 

내가 11살 때 1987년 아버지가 심장판막증으로 돌아가셨다. 당시 가족들은 수술비 1000만 원이 없어 치료를 포기하고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어릴 때였지만 어렴풋이 "돈이 없으면 사람이 죽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 후 잘나가는 외국계 의료기기 회사에서 일을 했다. 당시 2004, 이번엔 큰아버지가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다. 큰아버지는 독거노인으로 의료급여 1종 수급권자였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매달 병원비와 간병비를 포함해 300만 원이 청구되었다. 당시 나의 월급 300만 원과 맞먹었다. 큰아버지는 나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1년 반 동안 다른 가족과 돈을 나눠서 병원비를 지불했다. 그때 질문이 찾아왔다. “나는 월 300만 원으로도 병원비가 부담되는데, 88만 원 세대는 부모님이 쓰러지시면 얼마나 부담이 클까? 지금은 외국계 의료기기 회사에서 일을 하지만, 내 남은 인생을 누굴 위해 일할 것인가?"

나는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사회복지학 공부를 시작했다. 나 혼자 해결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1년간 사회복지학 공부를 했다. 돈이 없으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2007년 일인 사회복지 일을 시작했다. 건강세상네트워크,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등에 몸담았다가 현재 내가 만든 복지구가로 왔다.

 

■ 도봉민생상담소가 만들어진 취지와 목적 그리고 활동내용을 말씀해주세요.


도봉민생상담소는 주민들의 복잡하고 다양한 민생 문제들을 주민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도록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비영리 민간 상담사무소 이다.

2009년 현 건물에 도봉민생상담소를 개소했다. 도봉N이 마을신문을 첫 발행할 즈음이다.

민생상담을 위해 개인파산면책공부를 시작했고 85명의 상담자들을 만났다. 그 중 8명이 면책을 받았다. 그 밖에도 사회복지관련 상담, 노동상담, 서민금융상담, 보건의료상담 등 다양한 상담을 했다.

어머니 영어교실, 경력단절 여성교육, 사회복지 실습생 교육 등 다양한 교육도 했다. 사회복지사 실습 지도를 하면서 지역사회복지의 욕구조사를 비롯해 구정에 반영되는 과정까지 함께 지도했다. 일반시민이 이해하기 어려운 법률용어, 행정용어 그리고 외래어의 사용을 줄이고 쉬운 말 쓰기우리말 쓰기를 위해 노력중이다.

 

■ 활동 중에 가장 힘들었던 점과 가장 의미 있었던 점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2010년 구의원으로 출마했다. 제도권으로 들어가 의료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어린이무료필수예방접종을 보건소뿐만이 아니라 거주지에서 가까운 일반병원에서도 무료로 접종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취약계층 건강보험료 지원 등으로 공약을 내세웠다. 낙선 후 지도자는 내가 아닌, 주변에서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봉N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공적자금을 받을 경우 건강한 비판이 어렵다. 도봉민생상담소도 공적자금을 받지 않고 10년간 자리를 지키고 있다.

 

■ 타 단체와의 연대활동은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도봉N, 도봉교육복지센터, 도봉민생상담소, 내가만드는복지국가와 함께 회의장과 교육장을 공유하고 있다. 도봉N은 신문 한 번 만들어보자 하고 시작하여 만들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연대가 되었다. 잘 지키고 있으면 올 사람은 온다고 생각한다.

 

■ 민간단체가 협치나 사업을 통해 중복된 기능이나 역할을 하고 있는데 타 단체와 구별되는 고유한 정체성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도봉민생상담소는 빈틈을 매우는 역할을 했다. 때문에 많은 공부와 역량이 필요하다. 복지관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사례를 관리를 한다. 그 틈새에 있는 사람들이 상담소를 찾는다. 관과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활동하고 있다.

 

■ 앞으로의 활동방향성과 비전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20대는 주변의 권유로 살고, 30대는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고, 40대는 낮아지고 섬기는 삶을 살려고 한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외로운 주민들이 많다. 주민들의 외로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고민이다. 장기요양보호센터에서 외로운 분을 다시 만나서 서비스를 제공하기보다 그 분들의 이면이나 사연을 살피고 싶다. 외로움을 함께 하고 싶다.

 

■ 도봉구시민협력플랫폼에 대한 견해와 기대/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와해된 풀뿌리의 시민력이 복원이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뿌리 시민력이 복원됐으면 좋겠다.

타짜에 주목하기보다 외로운 주민을 만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급적 쉬운 말을 쓰면 좋겠다. 쉬운 말 쓰기는 인권과 생명에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도봉구 민간단체 소개 인터뷰 #4

 

도봉교육복지센터



교육복지센터에 대해서 소개해주세요.

 

2003년도에 교육복지투자우선지역지원사업이라고 해서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사업으로 시작이 되었다. 진행되는 과정에서 틀과 명칭 변경되었다. 2011년도에 교육복지특별지원사업으로 전환이 되었고, 2013년도에 16개의 지역교육지복지센터가 구축되었다. 학교에 법정 저소득학생이 40명 이상이면 거점학교로 지정이 되어 복지실과 지역사회전문가(복지사) 선생님이 배치된다. 법정 저소득학생이 40명 이하인 학교는 예산만 지원이 되고 있고, 10명 이하인 학교는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다.

학교 밖 지역사회전문가(이하 지전가)가 바로 교육복지센터이다. 예산은 교육청에서 지원받고, 공간은 자치구에서 지원받고, 사업비 지원을 받고 있다. 2013년에 도봉교육복지센터가 생겼다. 센터의 역할은 예산만 지원되는 학교의 경우 컨설팅과 사업을 함께 계획·운영 하고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학교의 경우 담임선생님이 추천해주는 학생을 연계 지원하고 있다.

도봉구는 2018년 기준 초등학교 23, 중학교 13, 고등학교 10개가 있다. 이중 초등학교 9, 중학교 7개가 거점학교로 지정되었다. 전체 46개 학교 중 교육복지우선지원을 받는 학교는 37개 학교에 달한다. 참고로 도봉구의 재정자립도가 서울 25개 자치구 중에서 24위이다.(2017년 기준) 다른 구는 거점학교가 줄어드는 추세인데 도봉구는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이다.

 

거점학교의 지전가 선생님은 누가 배치하나요?

 

교육지원청에서 직접 배치하고 관리하고 있다.


인근 노원구의 네트워크가 잘 된 사례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노원구는 위기 아동, 예를 들면 가정폭력 아동이 발견되면 아동이 연계되어있는 학교와 기관, 그리고 아동의 부모가 연계되어있는 기관들이 연계되어 있어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대책을 논의하고 실행한다. 대책을 논의하고 실행하는 시스템과 네트워크가 잘 구축되어 있다. 도봉구는 아직 그런 시스템과 네트워크가 약하다. 민관의 네트워크 구축과 강화를 위해 여러모로 센터도 지역도 움직이고 있으니 기대하고자 한다.

 

온전한 시스템과 네트워크가 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가 어떻게 구성되나요.

 

학교, 상담소, 청소년 담당기관, 치료기관, 경찰(공권력) 등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마을의 모든 기관들이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이것이 공동체이고, 진정한 교육혁신은 여기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위기 아동에 대한 대처 시스템, 메뉴얼이 있나요.

 

센터에는 정교한 매뉴얼은 없다. 그런 매뉴얼을 만들고 싶은데 시간과 여력이 없다. 교육복지센터 직원들의 경우 기간의 경험으로 대처하고 있다.

 

교육복지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학부서 청소년학과를 전공했다. 졸업 후 청소년지도사로 활동했다. 청소년들과 만나고 관계 맺고 하는 일이 나에게는 무척 즐겁다. 내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지도(웃음^^) 2012년도에 도봉구에서 교육복지시범사업을 하게 되면서 쌍문동 청소년 문화의 집을 운영하는 청소년교육전략21이라는 사단법인에 위탁을 주었다. 당시 나는 쌍문동 청소년 문화의 집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교육복지시범사업을 제안 받고 네트워크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활동하면서 알지 못하면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수 있다는 생각에 사회복지 전공 공부를 하고 전문대학원에서 상담도 전공했다.

 

현재 복지센터의 집중 사업은 무엇인가요.

 

학교다. 학교에 필요한 자원을 연결하는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지역의 다양한 기관과 자원을 학교와 연계하여 운영하고 마을교사 연계 및 인적자원 역량강화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다양하고 뜻하지 않은 욕구와 요구가 있을 때가 있는데 마을교사 연결이 쉽지 않다. 그리고 학교의 문을 여는 건 정말 어려운데 닫히는 건 쉽다. 학교와 신뢰가 깨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센터에서 모든 활동선생님들과 유대를 갖고 정보를 공유하고 교육을 한다.

지원아동과 연결해 줄 마을교사가 없어서 외부에서 섭외할 때가 참 안타깝다.

 

도봉구 민간단체 소개 인터뷰 #3

 

'늘품 글씨문화연구소'를 소개합니다.




지역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2012년에 여성센터에서 하는 캘리그라피 수업을 듣고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전에는 주부로만 육아와 살림을 했다. 약간 우울증도 있었는데 그때 마침 남편이 캘리그라피를 한번 배워보면 어떻겠냐고 권하더라. 캘리그라피 재미에 푹 빠져 매일 집에서 글씨만 썼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무슨 용기가 났는지 도봉뉴스에 마을축제 (발바닥공원 숲속작은도서관 벼룩시장) 홍보를 보고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내가 축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겠냐라고 문의했고 흔쾌히 답해주셨다. 그것을 계기로 마을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2014년에 마음과 뜻 맞는 사람들과 팀을 꾸려 쌍문동에 작은 사무실을 열었다. 그것이 늘품글씨문화연구소(이하 늘품’)의 탄생이었다. 현재 공간은 작년 8월에 입주했다. 팀원을 정회원, 준회원으로 나눠서 사무실을 공유하고 함께 작업하고 있다. 현재 늘품은 개인사업자로 되어있다. 앞으로 협동조합이나 비영리단체로 인가받으려고 한다. 준비해야 하는 서류나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힘들어서 잠시 중단했는데 다시 준비해보려고 한다.

 

늘품의 뜻은 무엇인가요.

 

늘품은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늘품에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외부에서 진행하는 수업과 내부에서 진행하는 수업이 있다. 현재는 외부에서 진행하는 수업이 더 많은데 점차 내부 수업 비중을 늘리려고 한다.

정기적으로 전시회 기획 중이다. 초반에는 찾아가는 전시회라고 도봉 전역 곳곳에 찾아가 전시회를 열었다. 지금은 전시공간도 많아지고 전시도 다양해져서 두 곳 정도에서만 전시회를 진행하고자 한다. 그리고 도봉문화재단과 함께 기획전도 진행해보고 싶다. 작가로서 성장하기 위해, 늘품만의 차별화된 색깔을 가지기 위해 작품 활동을 많이 하려고 한다.

413일에 방학천 예술거리 개관식을 한다. 그날 날이 좋으면 외부에 작품 전시도 하고 판매도 해보려고 한다. 폭넓은 경험을 위해서 외부 프리마켓도 참여해 볼 생각이다.



활동하면서 위기가 있었는지,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재정적인 것은 이제 거의 포기상태다. 꾸역꾸역 메꾸고 있는 상황이다.^^;

활동하면서 제일 어려운 것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본 의도는 그렇지 않은데 왜곡되어 전달되서 불필요한 오해와 상처가 생길 때가 힘들다.

정현혜 팀장님이 마을축제에서 캘리 퍼포먼스를 제안했었다. 캘리 퍼포먼스를 통해 나와 외부에 예술작가로 인식되는 것이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외부에서 아무리 많은 전시와 작품활동을 해도 지역 내에서 공유되기가 어려웠다. 이것을 계기로 지역과 마을에서 다양한 시도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캘리그라피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학교 다닐 때 서양화를 전공했다. 너무 어려웠다. 그런데 캘리그라피는 그림 그리는 것보다 쉽고 그림 그리는 것처럼 재미있다. 글귀를 쓰는 것이다 보니 내 마음을 글귀에 담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 글귀를 쓰며 내 마음이 힐링되고 글귀를 보며 다른 사람이 힐링 되는 게 좋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만의 매력이 있다.

 

마을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로서의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외부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보다 마을에서 성장한 예술가가 저평가되는 현실이다. 심한 경우 예술가로서 인정을 해주지 않는 모습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을 그냥 수용하고 개인이 이겨내야 하는 문제로 인식하는 게 안타깝다.

특히 예술거리에 있는 작가들은 작품 활동이 생업과 이어져 있다 보니 장사하는 사람으로 비춰지는데 예술가로서 실력과 자질을 높이는 게 과제인 것 같다.



마을에서 성장한 예술가들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개선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도봉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모인 도봉예술인연대가 있는데 여기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도봉문화재단이 안정화되면 도봉 내의 예술인들이 다시 평가되는데 기여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있다.

 


시민협력플랫폼에 대한 당부의 말씀 해주세요.


 

기존에 네트워크가 있었다고 없어지기도 하고 기류들이 너무 많아 중구난방인 느낌이다. 시민협력플랫폼이 권력이 되지 않고 평등하게 소통하고 여러 기류를 하나로 잘 정리하는 네트워크가 되었으면 좋겠다.






* 인터뷰에 응해주신 늘품 글씨문화연구소의 조진경 대표님 감사드립니다.

도봉구 민간단체 소개 인터뷰 #2

 

'책을 타고 날다'를 소개합니다.

 


 

지역에서 활동하게 계기가 무엇인가요.

 

20103, 첫 아이 6개월쯤 도봉에 이사 왔다. 비슷한 시기에 출산 육아를 거친 또래 엄마들이 모여 <도담공동육아협동조합> 어린이집을 개소하면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지역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창5동에 나라사랑북부청년회라는 청년단체 사무실이 있었는데 회원들이 대부분 직장인이다 보니 주중 일과시간에는 사무실이 거의 비어 있었다. 그 공간을 좀 더 유용하게 썼으면 좋겠다 싶어서 청년회 회원들과 지역활동가 몇몇이 민간 작은도서관 <책읽는사람들>을 만들어서 초창기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같이 하게 됐다. 작은도서관은 공간으로써 도서관이자 지역 주민들의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돌봄이 제대로 되지 않는 마을의 아이들을 도서관이라는 공간과 활동을 통해 담아보고자 했었지만, 막상 도서관 문을 열었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가 만나고 싶었던 어려운 아이들이 스스로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저소득층 아이들을 기다리지 말고, 찾아가는 활동을 해보고자 해보고자 했고 2011<도봉구작은도서관협의회(도도협)> 산하 <책을타고날다> 사업단으로 만들었다.

작은도서관 책읽는사람들을 만들기 전 도봉에는 초록나라(도봉동)와 생글(쌍문동) 2개의 민간 작은도서관이 있었다. 민간 작은도서관이 3개가 되면서 작은도서관 간의 연대의 필요성을 느껴 <도봉구작은도서관협의회(도도협)>를 결성했고, <책을타고날다>가 예비사회적 기업으로 활동하다가 2012년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하면서 도도협으로부터 분리 독립했다.

 

책을 타고 날다활동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지금 도봉문화정보도서관 이순임 관장님이 당시 초록나라 도서관에서 활동하실 때, 취약계층에서 책배달 활동을 하셨는데 책을타고날다 활동은 거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도서관이라 책은 많고 책을 활용해서 좀 더 어려운 아이들을 직접 찾아가는 활동을 해보자는 취지로, 독서심리상담사 자격과정을 취득해서 이왕이면 마음이 아픈 아이들의 마음도 도닥여 주는 활동을 해보면 좋겠다 싶었다.

2011년 북부교육청에서 저소득층 학생을 지원하는 교육복지특별지원사업이 시작되어서 학교에서 할 수 없는 교육복지사업을 함께 할 지역 파트너를 찾고 있을 때, 책을타고날다가 함께 하게 됐고 초중학생 1:1 가정방문 독서치료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인큐베이팅 했다.

교육복지특별지원사업은 복지의 개념이 확대되어 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취약계층 학생들의 교육소외 현상(학습, 문화, 심리정서, 가족지원 등)를 맞춤형 복지 서비스 제공으로 해소하기 위한 국가 교육정책의 일환이다.

 

교육복지학교로 지정된 학교는 학교 안에 지역사회교육전문가(사회복지사)가 담당자로 있어서 우리 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저소득층 아이들을 추천받아서 아이들을 만나고, 집으로 방문해서 책을 매개로 상담치료 활동을 했다.

저소득층 가정의 경우 제대로 돌봄이 안 되어서 사전에 보호자 동의와 시간약속을 하고 방문하는데도 갑자기 연락이 안 된다거나, 집에 인기척이 있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도 가정방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이유는 찾아가는 활동을 통해 아이가 놓인 환경과 상황이 어떤지 훨씬 직간접적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노출된 위험이 있다면 빨리 캐치해서 지역과 연계하고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

아이들은 주 1회 방문활동을 기준으로 해서 년간 길게 만난다. 아이들의 변화란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에 꾸준하고 장기적인 활동으로 아이의 변화와 성장을 이끌어낸다. 가정방문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아이뿐만 아니라 주양육자이자인 보호자(부모, 조부모 등)의 참여와 자녀에 대한 긍정적인 양육태도 변화를 유도해내고자 한다.

만나는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너 자신이 소중하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지지 격려해주고 사랑해주는 일이다. 책을 매개로 한 독서심리상담이지만, 사실은 이 활동이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랑받지 못하는 약자 아이들에게 사랑의 교감을 나누는 활동이라고 생각해서 프로그램명도 <마음이 성장하는 책읽기>이다.

2011년부터 책을타고날다가 지금까지 만난 아이들의 인원이 매해 늘어났으니까 약 3천명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활동하면서 어떤 점이 힘들었나요.


우선, 학교를 만나는 것이 힘들었다. 교육복지특별지원사업이 처음이다 보니, 학교에서는 민간인-민간단체와 관계형성이 처음인지라 처음에는 잡상인, 외판원 취급을 했다. 당시 학교의 문턱이 꽤 높았다. 교육복지사업이 처음이다보니 학교 입장에서는 당연했을 수도 있지만 담당자인 지전가와는 사업 취지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는데, 결재라인이 있다보니 부장교사-교감- 교장선생님까지 거쳐야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지금은 8년간 연계와 신뢰관계 형성으로 담당자와 협의를 통해서 진행된다^^

 

아이들을 만날 수록 한 아이가 갖고 있고 겪고 있는 아픈 사연들의 무게가 어마어마했다. 아이들을 만나고 온 선생님들은 매 회의 때마다 아이들의 엄청난 사례들을 함께 나누면서, “아이들의 엄청난 사연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지, 우리가 과연 할 수 있을까?”, “겨우 주 1회 만남을 통해 아이들의 변화 성장이 가능할까?”하는 생각들을 많이 나누고 아파했었다. 아이들 곁에 힘이 되어줄 단 한 사람만 있어도 될텐데라는 안타까운 생각에 작지만, 선생님들이 아이들 얘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믿어주고 안아주면서 아이들이 성장한 만큼 선생님들도, 책을타고날다도 함께 성장해왔다.

 

, 책을타고날다 초창기 예비 사회적기업일 때가 쉽지 않았다. 예비 사회적기업은 공익적인 활동을 하면서도 수익창출이라는 경영을 동시에 진행해야 했어야 했다. 당시 서울시청 사회적기업 담당 주무관에게 사업운영에 대한 질문을 하면, 우리의 질문내용이 매뉴얼로 보강될 정도로 제대로 된 답을 해주는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사업취지는 의미있지만, 자리를 잡고 성장하기까지 뼈아픈 과정이 많았다. 예비 사회적기업 단계에서 충분히 의미있는 시도를 했으나 저소득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교육복지 영역을 기업경영으로 진행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에서 단체 성격을 비영리민간단체로 정리하게 됐다.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 포기하지 않게 한 힘은 무엇인가요.


도봉지역에 살면서 마치 이 곳이 고향인 듯한 애정을 느낀다. 처음 도봉에 대한 인상을 평화롭고 소박한 도시라서, 서울이지만 삭막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런데 책을타고날다 활동을 통해서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아이들을 지역 곳곳에서 만나면서 지역이 다르게 보였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를 추구하면서 시작한 활동이었지만, 한 아이를 만났을 때 아이 전체 인생이 우리에게 넘어온 듯 한 느낌이 들어서 두렵기도 했지만,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과 정기적인 만남이었기 때문에 그 시간만큼이라도 소중하고 의미있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매순간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자신의 환경을 스스로 선택해서 태어난 아이는 없다. 아이들에게 행복한 가정과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가장 필요하지만, 만약 가정이라는 지지체계가 약하다면 지역사회가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책을타고날다는 부족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울타리 교육공동체가 되고자 한다.


앞으로의 방향과 전망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8년전 처음 아이들을 만났으니,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났던 아이들이 이제 중학생이 되었다. 책을타고날다는 다년간 아동을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 지역의 다양한 구성원들과 청소년을 본격적으로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아동영역은 교내 방과후 학교, 교내 돌봄교실, 학교 밖에는 지역아동센터, 마을학교 등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고 있으나, 청소년 영역은 학교와 청소년 시설 외에는 준비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크고 작은 청소년 공간들이 생겨나는 현상은 매우 반가운 현상이라고 본다.

 

저출산 시대 인구 감소에 따라 아이들 숫자도 감소하지만, 도봉구에 저소득층 아동청소년 숫자와 비율은 줄지 않고 있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한 예로, 방학동에 위치한 **중학교가 8년 전 750여명이었던 재학생이 현재 450명 이내인데, 그 중 저소득층 비율은 25%가 넘는다.

서울 25개 자치구 중 도봉지역 저소득층 초중학생 숫자통계는 25개 자치구 중 8, 비율통계는 4위에 해당하고 그 중 방학 1~2동에 밀집도가 높다. 이런 현황은 집값과 매우 연관이 높고, 2000년대 후반 뉴타운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도시빈민들이 경기도권으로 밀려나기 전 마지막으로 정착하는 지역이 경기도 접경지역인 구로구, 금천구와 같이 도봉이기 때문이다.

 

대도시 서울이지만 빈곤 격차가 심화되고 있고, 가족단위로 저소득층 인구가 유입되고 있는 서울의 끝자락 도봉지역의 어려움과 도봉지역 민간교육복지 주체로 다년간 시도를 통해 삼성꿈장학재단 지역교육네트워크 사업에 선정됐다.

이 사업은 장기적으로 10년간 <청소년 교육복지 모델링>을 진행하는 사업으로 전국에 11개 지역교육네트워크 사업이 진행 중이며 그 중 올해 2개 지역교육네트워크가 신규로 선정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책을타고날다가 대표단체인 <도봉청소년지원네트워크 이음>이다.

<도봉청소년지원네트워크 이음>은 민간교육복지네트워크로써 저소득층 밀집도가 높은 방학 1·2동을 중심으로 활동을 진행할 예정이다.

청소년들의 교육적 성장을 지원하는 민간교육역량을 결집하여 교육인프라를 조성하고, 청소년 거점공간 모델링 시도와 함께 민간교육네트워크로써 기반조성을 올해 진행 할 예정이다.

, 지역 청소년들의 교육/복지/문화적 일상생활 수준과 동선은 어떠한지에 대한 현황조사에 기반해 장단기 활동방향을 설계해나갈 예정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을타고날다 대표에서 네트워커로 배출되서 <도봉청소년지원네트워크 이음> 대표로 활동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시민협력플랫폼에 조언을 해주신다면.



요즘 많이 드는 생각은 단연 네트워크다네트워크가 무엇인지, 관에서 할 수 있는 게 따로 있고 민간이 할 수 있는 게 따로 있을 텐데 민간의 장점을 살리는 네트워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네트워크가 추구해야할 가치와 비전, 네트워크 조직 문화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가 고민이다.

솔직히 <도봉청소년지원네트워크 이음>대표로 활동하게 됐지만, 요즘말로 네트워크를 1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작은 민간단체가 활동할 때는 그 구성원간의 합의 결정으로 운영해나가면 되지만, 네트워크는 다양한 파트너들과 관계맺기를 통한 멤버십 형성부터 시작해서 각기 다른 방식의 운영체계와 운영방식을 넘어서 해결하고자 하는 의제를 중심으로 살아있는 유기적인 활동이 되어야 할텐데...

시민협력플랫폼도 같은 고민이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네트워크=공동체이며 공동체가 먼저가 아닌, 시스템에 맞게 공동체를 움직이면 자칫 공동체를 해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네트워크라는 공동체가 충분히 무르익고 우리 스스로 준비가 필요한 것 같다.

 

네트워크=공동체가 되려면 아래로부터의 네트워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게 네트워크의 조직문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래로부터 시작된 문화나 네트워킹은 위로 빠르게 번져가지만, 위로부터 시작된 문화나 네트워킹은 그 수준이 되어야 만이 껴주기때문에 확산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네트워크와 공동체는 누가, 어느 영역이 가장 어려운지를 우선 관심 갖고 살피고, 그를 함께 해결해나가는 것부터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인터뷰에 응해주신 '도봉청소년지원네트워크 이음'의 "전정훈"대표님 감사합니다.

도봉구 민간단체 소개 인터뷰 #1


 

'도시마을연구소'를 소개합니다.




도시마을연구소를 하기 전에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도봉시민회에서 활동했다. 도봉여성희망학교(현재 동북시민학교) 인문학 강좌를 들으러 갔다가 도봉시민회를 접하게 되었다. 공공성에 대해 관심이 없었는데 공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감동 받았다. 기존 담당자들이 손 놓으면서 내가 도봉여성희망학교 간사를 맡고 커리큘럼을 짜는 등의 기획, 운영을 했다. 도봉여성희망학교는 공공성을 갖춘 여성리더십 양성이 목표였다. 상반기에 인문학 강좌를 들은 수강생들이 하반기에는 활동을 하는 식이었다. 사람을 발굴하는 과정이 참 쉽지 않았다.

 

도시마을연구소가 생긴 과정에 대해 말해주세요.


도봉여성희망학교 간사로 활동하는데 급여가 아주 적었다. 활동하면서 시간과 돈 등 오히려 내가 가진 것을 투자하면서 해야 했다. 도봉시민회 활동하면서 돈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도록 고용 창출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도시마을연구소였다. 초기 사무국장을 이은경 도봉시민회 대표님이 했었다.

활동가나 NPO 활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사회적기업" (성공회대-노동부주관 1기와 희망제작소), "소셜다자이너" , "마을이 학교" 지역재단 등을 통해 공부 하고 인맥을 많이 쌓았다. 당시에는 사회적 경제, 사회적 기업이라는 개념이 생소할 때였는데 도시마을연구소를 열고 남양주 사회적기업가 교육과정을 맡아 집중하면서 자연스럽게 시민회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도시마을연구소의 중심사업과 주요활동은 무엇인가요.

 

도시마을연구소는 마을 살려내기 마을주민 참여형 연구소이다. 마을 리더, 사회적 기업가, 사회적 경제 등의 양성 교육, 연구, 포럼을 진행한다. 이전에 없던 교육과정을 만들어서 직업 만드는 일을 주로 했다. 우리 연구소 교육과정을 통해 훌륭한 공익활동가를 배출한 것이 성과이다. 많은 분들이 사회적기업가, 협동조합 npo 활동가, 커뮤니티전문가, 찾동, 취업 마을센터 센터장 등 마을 곳곳에서 활동하고 계신다. 커뮤니티 플래너도 양성해서 아파트 공동체 활성화 사업도 했다. 1회 포럼을 당시 11개 지자체에서 활성화되고 있던 마을공동체 사업 발제로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의미있게 진행했다.

이전에 민간에서 다양하게 함께 했던 마을 만드는 작업들이 박원순 시장하에서 행정 쪽으로 많은 부분 흡수되어 획일화되는 것이 안타깝다.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교육과정과 프로그램들을 관에서 보호해 줘야 하는데 다 벤치마킹해서 유통하고 있다. 자유로운 시민의 다양성과 주도성 및 창발성이 갖는 역동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현재는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사회적경제 지원조직이 지역별로 있기 전 그것을 도시마을연구소에서 만들어보려고 했다가 내부의 반대로 하지 못했다. 그 후 도심바이오에너지 조성 연구사업을 진행했다. 카이스트는 원천기술을 연구, 국제원조와 타당성 검토는 알씨씨에서 하고 기술결합인 현장적용 파트로 도시마을연구소가 결합했다. 기획 과제 이후 본과제에서 공동연구팀이 탈락 후 도시마을연구소는 새로운 비전, 외연 확장 동력이 떨어졌다. 현재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도시마을연구소의 현재진행형은 나눔가게 씨감자휴먼북 천개의 씨앗으로 볼 수 있다. “휴먼북 천개의 씨앗은 숨은 활동가 찾기와 크라우드 펀딩 방식을 통해 공익활동가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작년 8월부터 매달 휴먼북 콘서트도 진행하고 있다.

 


                                                                                                                                                             

* 인터뷰에 응해주신 도시마을연구소 "박은희"소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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